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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4. 2021

동학과 서학의 접점에서 개화하는 새 문명

잠깐독서-055 - [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 ] 중에서

[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 머리말(5~7쪽) 중에서 


서구열강의 동양 침략이 시작되어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 ‘인식론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서학에 대한 대응 방식은 다양하였다. 


어떤 부류는 서학과 서양 문명의 도전을 유교적 정치 체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무리들로 보았고(守舊派), 또 다른 부류는 서기동도적(西器東道的) 실학사상으로, 혹은 보유론적(輔儒論的) 근거로 서학 천주교의 교리를 유학의 재해석으로 발전시켰다(親西派). 그러나 또 어떤 부류는 유교적 생활 양식을 포기하고 천주교를 수용하고 그 가치관으로 살고자 했기에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開化派). 더 나아가 종교의 제도적 운이 다한 유교, 불교, 도교적 전통의 진수를 캐내고 민중의식 속에 살아 있는 한울님(천주) 신앙과 결합시켜 대안적 종교운동을 펼친 이들이 있었는데 ‘다시개벽’의 동학이다(開闢派). 


이러 한 다양한 응전의 방식은 조선 사회문화의 심층에 숨겨진 보편성, 즉 그 시대의 현상적 문화에 구속되지 않고 더 큰 진리를 향해 개방하려는 인간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의 인식론적 위기 상황에서도 가장 고통 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고통과 갈망을 헤아리면서 자기 문화의 심층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영성운동이다. 조선 말기에 천주 신앙을 죽음을 통해 지킨 천주교와, ‘동학(東學)하다’는 동사가 은유하듯 개벽을 실천한 동학쟁이들의 ‘시천주 운동’이 이런 영성운동의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천주교는 제국의 국제정치에 편승하여 전해졌고 제국들의 영향 하에 있는 만큼 한계가 분명했으나, 그럼에도 유교 사회를 개화로 이끌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동학은 민중의 신앙을 부활시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창조적 힘은 막강하였고, 동학농민혁명, 3·1비폭력독립선언, 일제 침략 시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힘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집트의 노예생활과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소국 이스라엘에서 유대교가 발생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체험으로 천주의 구원을 선포한 민중들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것처럼, 서세동점 위기상황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비전은 궁극자이고 보편자인 하늘을 지향하여 어떤 약자의 배제도 허락하지 않는 천도(天道)의 선포였다. 


고통의 절규 속에서 한울님(天主)의 현존은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이성에 계시된 신앙’일 수도 있다. 근대 개화기에 문명과 종교 간의 충돌이 만든 불행한 사태들은 힘의 논리로 진리를 강요하거나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해석학적 지평의 한계도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선진유학, 성리학, 실학, 서학과 동학이 ‘천-상제-하느님’이라는 유사한 절대인식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타자 안의 하늘’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충돌과 혼동의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 분명하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민중 종교들(천도교, 원불교, 증산교)의 탄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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