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육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Jul 16. 2019

심리학 과잉 시대의 학교

(2018년 10월)

초등학교 6학년 가창 실기평가 시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당황한 음악 선생님은 계속 다그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어른들은 말했다. ‘자신감을 가지렴’, ‘너는 할 수 있어’, ‘노래를 잘하잖니?’, ‘손에 땀이 나고 팔다리가 후들거리니?’, ‘아프니? 혹시 병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닐까?’ 당시에는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2년 전에 노래 시험을 보다가 실수로 음을 이탈해 망신을 당했었다. 좋아하는 아이 앞에서 유치한 동요를 부르다 삑사리가 나는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은 장소, 그뿐이었다. 나는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었다. 실제 몇 년이 흐른 후 나는 다른 음악 선생님에게 음정이 기가 막히게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는 음악실에 한 명씩 따로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교사가 된 지금 나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헛발질’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산만한 학생에게 흔히 ADHD 진단을 내린다. 팔다리를 흔들고, 손톱을 물어뜯고, 볼펜을 분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한 수업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 내내 졸기만 하는 학생에게 내면의 의지와 집중력이 약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미래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수업 내용, 앉아 있기 힘든 딱딱한 교실 의자, (학교에서 매일 졸든 말든) 결국 수능 한방으로 해결하는 한탕주의 교육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심리 상태에 대한 공허한 지적질, 무의미한 판단질이 학교와 사회에 난무한다. 권력은 늘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한다. 지나치게 대중화, 상업화된 심리학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한다.




상담 심리를 공부하는 교사들이 많다. 각종 자격증과 수료증이 넘쳐난다. 교사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상담이나 심리 연구에 몰입하는 경향도 있다. 현실적으로 학생이나 학부모와 관계가 틀어졌을 때를 대비한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직업 특성상 학생들을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본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걱정스러운 모습을 종종 마주하기도 한다. 

상담을 핑계로 관계에 위계를 설정해 꼰대질을 하거나(나는 상담자고, 너는 내담자야), 어설픈 심리학 지식을 이용해 사람 유형 구분하기에 매진하는 분들을 보면 숨이 막힌다. 조울증, 우울증, 조현병, 감정조절 장애, ADHD처럼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영역까지 용어를 남발하고 위험한 개입을 하기도 한다. 교육 현장에서 개인의 심리를 이해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맥락, 환경, 구조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을 수도 있다.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지인은 회사원이다. 그 회사의 한 고위 간부가 대인 관계 개선 코칭 자격증을 땄다. 사원들을 대상으로 코칭을 할 때마다 사원들은 질색팔색을 한다. 그 간부는 회사에서 가장 자기객관화가 안 되는 인물로 악명이 높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본인을 싫어한다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인의 표현대로라면) ‘어디서 배운지 모르겠는 알량한 기법’으로 사람을 조종하려 드니 마루타가 된 것처럼 불쾌했다고. 


본래의 취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심리학은 자주 사회의 수직적 질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활용된다. 인간의 내면에 지나치게 집중하며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 힘의 우위에 있는 자들은 심리학 도구들로 사람을 선별 및 배제하고, 약한 자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나는 학교에서 ‘학생 정서 행동 검사’ 업무를 맡고 있다. 1학년과 4학년 학부모들이 검사지를 작성해 학교에 제출한다. 학교는 결과에 따라 주의를 요하는 학생들을 상담기관에 연결한다. 학교 입장에서는 추후 조치가 번거로워 문제 학생 수가 되도록 적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검사의 효용성, 학부모가 하는 학생 정서 검사의 신뢰성과 정확성, 낙인 효과 발생의 부작용도 우려스럽다.



지능 검사와 심리 테스트는 기원부터 께름칙하다지능 검사는 1905년 프랑스의 비네A.Binet가 처음 만들었다특수학급에 배치할 아이를 선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그 후 이 검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의 능력 감별을 위해 사용된다성격 테스트의 기원은 체액과 기질을 논하던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최근에도 자주 사용하는 질문지법은 1917년 워즈워드R. S. Wordsword에서 시작된다이 성격 검사의 목적은 전쟁 중 군대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신경증에 걸릴 것 같은 사람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즉 지능 검사와 성격 테스트는 애초 노동과 전쟁에 효율적인 인간을 선별배제하기 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심리 검사의 타당성과 신뢰성, 윤리적 측면뿐 아니라 ‘평균’이라는 개념 자체도 도전받고 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 연구소를 이끄는 연구자이자 ‘평균의 종말’의 저자 토드 로즈는 말한다. ‘평균적인 신체 치수 따위가 없듯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지능, 평균적인 성격 같은 것도 없다’.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이 개개인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다. 하지만 심리학은 학생의 성장, 발달, 행동, 정서에 일일이 순서와 값을 매긴다. 교육 당국은 이를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표준화된 심리 검사까지 실시하고 있다.  


그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고 신나게 가르칠 수 있을까. 교사들은 고민한다. 교사들 중에서도 특히 초등 교사들은 교육방법과 기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대학교 커리큘럼, 연구대회나 실적도 비슷한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교육 방법론들은 대부분 교육 심리학의 응용물이다. 물론 배움은 즐겁고 신나야 하지만 사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의 저자 오자와 마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육심리학은 가르치는 내용 자체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어떻게 제대로 잘 가르칠까, 어떻게 아이에게 의욕을 가지도록 할까 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p.48) 


지식을 말랑하게 다듬어 '어떻게' 입에 넣어줄지 고민하느라 정작 중요한 교육 내용, 교육 환경, 이를 둘러싼 사회 구조에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현실을 향해 질문하고, 비판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억압해 기득권 체제 유지를 공고히 함은 물론이다. 교육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심리학의 효용과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심리학과 인간, 교육, 철학이 연결되는 지점들에 대한 질문을 멈출 수 없다. 인간의 감정에 가치와 값을 매길 수 있는가? 심리 검사는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 우등과 열등으로 구분하지 않는가? 교육과 학문의 선한 의도는 반드시 선한 결과를 불러오는가? 심리 상담의 틀 안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경직되지 않는가? 학생이 즐겁게 공부하고 무탈하게 학교를 다닐 수만 있다면 학문과 교육의 이름으로 인간을 조종해도 좋은가? 인간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교육이 될 수 있는가? 


교사는 심리 상담이 아니라 교육을 하는 사람이다. 학교는 상담소가 아니라 대화를 하는 장소이다. 우리는 어설픈 심리학 지식으로 구획된 틀 안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관계 역동의 주체이다. 심리학은 타인을 판단하고, 가르치고, 처방하기보다 듣고, 관찰하고, 이해하고, 기다리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존재한다. 오직 그러한 맥락에서만 심리학은 인간과 교육,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교육은 늘 출발하는 만남이며 새로운 출발에는 늘 긴장과 우여곡절이 있다.  


인간을 가두려는 시도는 중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만지고, 타인을 느끼며, 동시에 타인을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프란츠 파농


*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8년 10월 8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