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정확한 사과

by 김현희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고 싶고, '작품의 육체에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되어 세월을 견디고 나아가는' 그런 칭찬을 하고 싶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p.324). 나는 평론가나 예술가가 아니지만, 이 말뜻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정확한 칭찬을 받을 때 정확하게 자랐고, 정확하지 않은 칭찬 속에서 무섭도록 외로웠다.


나로서는 사과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사과하고, 정확하게 사과받고 싶다. 정확한 인식에 바탕한 정확한 사과는 불편한 상황을 종료시킴은 물론이고 그런 사과 이후의 관계는 더 깊고 진해진다. 나는 사과에 관해서라면 부정확성과 서투름도 수용할 수 있다. 나 혹은 상대방이 사과할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할지언정 사과를 주고받는 행위 속에서 '나는 너를 존중해. 너의 감정에 신경 쓰고 있어'라는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최악은 정확한 인식에 기반한 사과는커녕 아예 사과란걸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나는 화가 나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내가 어떤 지점에서 감정이 상했고, 어떤 지점이 불편부당하다 생각하는지 정확히 표현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내 쪽에서 성의를 담아 표현을 했는데도 상대방이 이해를 못 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신뢰를 접는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길, 살다 보면 사과를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조직 논리가 작용하거나 혹은 타고 나길 눈치없게 태어난 사람도 있다는 거다. 나는 조직 논리라는 말에 회의적이다. 인간이 추구할 가치와 신의를 넘어선 조직 논리란 양아치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또 지나친 눈치 없음은 자기중심성의 발현에 불과한데 나는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첫 단락 신형철 문장 인용: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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