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성
문체의 기초를 ‘인격’이라 말하는 루카스의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글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글쓴이의 인격도 읽는다. 인격이 '읽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수 있겠다. 허용적인 문체가 있고, 일방적인 문체도 있고, 좀스러운 문체가 있고, 담대한 문체도 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문체는 박력있지만 배려심이 많고, 확고한 개인의 의지가 느껴지면서도 자기 안으로 숨지 않는 문체, 즉 그런 인격이다. 훌륭한 인격이 그런것처럼 훌륭한 문체도 획일적이지 않다. 모든 훌륭한 문체와 인격에는 고유한 색과 목소리가 있다.
루카스는 ‘독자에 대한 예의’로 명료성, 간결성, 다양성, 세련성과 소박함, 낙천적 기질과 유쾌함 등을 말한다. 특히 '명료성'을 강조하며 탁월한 통찰을 보이는데, 아래 문장을 읽으며 평소 내가 모호한 말과 글에서 느껴온 불쾌감의 근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산문에서 모호하게 글을 쓰는 자는 대개는 허세를 부리고 자기중심적인 자다. 열린 마음과 공감하려는 태도로 자기만의 목적을 넘어서서 더 큰 목적을 달성하려고 글을 쓰는 자는 글이 명료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사고가 명료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좋은 산문의 길, 스타일. p.104 / F. L. 루카스/ 메멘토)
한편 '명료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퀸틸리아누스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나는 오랜 기간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을 느껴왔고, 실제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마법같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최근 나는 그런건 애초 지속가능한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의구심에 봉착했다. 나의 목표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상투적이고 뻔한 사람,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닐거다. 나의 책임 범위를 폭넓게 인식하려는 노력 속에 더욱 명료해지는 사람, 이해받지 못했다고 징징대기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오해받지 않는것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 지금 나는 이 말을 그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