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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l 16. 2019

새 시대의 새 꼴통

언더그라운드 교사일지 3

요즘 학교에는 꼴통 관리자가 급격히 줄고 소위 민주적인 교장들이 늘고 있다. 여기서 꼴통 관리자란 교사 면전에 결재판을 날리고, 학교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임신한 교사까지 강제로 배구 시합에 동원하는 등의 만행을 일삼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80년대 말죽거리 잔혹사형 관리자를 뜻한다. 이런 유형의 꼴통의 수가 현저히 줄은 건 사실이지만 교육계의 ‘꼴통력’ 자체가 줄었는지는 의문이다. 꼴통력의 정의와 관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전 꼴통들이 건달 같았다면 요즘 꼴통들은 양아치스럽다. 우아한 외모와 언행을 몸에 두르고 월급 루팡짓만 일삼던 관리자가 있다. 그분은 내가 학교 의사 결정의 민주성과 예산 운용의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하자 언성을 높이기는커녕 ‘평생을 교직에만 헌신한 내게 왜 이러냐’는 슬픈 눈빛으로 스스로를 연민할 뿐이었다. 그러다 학폭과 악성 민원이 터져 학교가 쑥대밭이 되자 재빠르게 병가를 쓰고 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학교 운영 전반에 관심을 갖고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관리자가 흔치 않다. 지독한 자기 합리화, 무책임 그리고 철학의 부재. 나는 새 시대에 피어나는 꼴통력을 마주하고 있다.




20세기 꼴통들이 무지막지한 위법 행위로 공적 시스템을 파괴했다면, 21세기형 꼴통들은 합법과 편법 사이를 넘나들며 시스템을 교란한다. 이들은 깨어있는 민주 시민의 얼굴을 하고, 법조항과 매뉴얼을 줄줄 꿰는 뛰어난 정보력으로 자신의 안전망을 확실히 구축한다. 일단 안전 구역을 확보하면 "법으로 안 되는 거 빼곤 다 된다!"는 식으로 주변을 장악한다. 얼핏 합리적이고 고상해 보이지만 피해망상 내지는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친 경우도 있고, 공감 능력을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방어성을 구축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21세기형 꼴통들에게 지식과 정보는 말 그대로 ‘무기’이다. 


세대 프레임은 늘 조심스럽지만 꼴통력에도 연령대별 차이가 존재한다. 연배 높은 꼴통들은 ‘교육 가족’, ‘행복’, ‘힐링’, ‘위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경향이 있다. 자기 손에 피 묻히지 않는 품위 있는 언행으로 교직원을 하인처럼 부리고, 골치 아픈 일은 어떻게든 피하며, 현상의 본질은 보지 않고 변죽만 울린다.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은 ‘교육 가족’은 가‘족’같다는 언어유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유머 감각과 분별력을 갖추었다. 이들은 워라벨을 중시하고 자기 계발에 매진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꼴통 선배들처럼 되지 않겠다. 승진 제도를 비롯한 교육계의 부조리를 바꾸겠다. 일단 승진부터 하고.’ 


새로운 시대의 꼴통력은 상냥한 관료의 얼굴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화되지 않았을 뿐 학교 안팎 곳곳에 생생하다. 수업 시간에 숨넘어갈 듯 울려대는 인터폰 소리 속에,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공문부터 확인하는 평범한 아침 풍경 속에, 화려하게 포장된 교육 활동 보고서 속에, 컴퓨터 모니터에 붙박힌 교사들의 눈 속에, 수치화하기 쉬운 지표로 빼곡하게 채워진 학교 평가, 차등성과급 기준안 속에, 착실히 쌓아가는 승진 점수 속에, 연수 시간을 채우기 위해 눌러대는 마우스 클릭질 속에, 걸핏하면 날아오는 ‘긴급’한 자료 제출 요구 속에, 수업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교사의 요구를 ‘교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고 못 박는 어느 정치인의 대담함 속에서도 꼴통력은 찬란하게 빛난다. 


학교는 달라졌다. 최근 목격한 최악의 진상짓과 막말의 주인공들은 관리자, 교사, 학부모를 가리지 않았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권위적인 문화 역시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라는 유기체의 민주성과 구성원들의 시민 의식에 대해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부유층 전용 주택지에 살며 유기농 식품만 먹고,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지만 자기들 집 짓느라 잘려나간 산과 파묻힌 강들은 나몰라라 하는 부류들. 내가 볼 때 소위 민주적이라 불리는 관리자들 중 많은 이들은 교육 환경의 황폐화와 파편화, 부조리한 시스템의 유지와 재생산에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도 지위가 주는 안락함을 딛고 자신이 만든 결과로부터 손쉽게 빠져 나온다. 이들의 위선과 기만은 부딪쳐 싸우기도 쉽지 않다.


문학 비평가 고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 과거도 착취당한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밤이 선생이다, 난다출판, 12쪽)


어쩌면 한 교육자가 지닌 감수성의 질도 그 사람이 학교와 사회의 꼴통력을 얼마나 두텁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가름될 것이다.



* 이 글은 딴지일보에 실렸습니다.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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