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게 두 번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중학교 시절 가정선생님이었다. 가족의 의미에 대한 수업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반 전체를 대상으로 거수를 하자고 하셨다. 먼저 ‘본인이 가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하자, 반 친구들이 드문드문 손을 들었던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슬쩍슬쩍 낙서를 하며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본인은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필요한 사람이다’ 부분에서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갑자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친구들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 반에서 오로지 나 혼자 손을 들었던 것. 몹시 당황한 내게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보라 하셨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었기 때문에 망설이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제가 피해를 준 건 없는 것 같아서요..”
친구들은 다시 키득거렸는데, 동그란 눈의 예쁜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약 3초간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싸가지가 없구나.”
어리둥절한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는데 황당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그 감정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지금은 도대체 왜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다들 자신을 '가족에게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지가 더 궁금하다)
두 번째는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교육계 선배분이 일련의 사건 끝에 마음이 상했는지 내게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서...'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말로만 듣던 일부 중년 운동권 출신들의 개막장 드라마 한가운데 놓인 기분이었다. 교육과 진보의 가치도 나이 차이와 가부장적 습속 앞에서는 속수무책인가 싶었다.
오늘따라 '싸가지'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최근 있었던 작은 소동의 영향도 있고 명절, 전통, 선배, 예의 같은 단어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 억울하고, 오해받는 기분이 들며, 세상이 쳐놓은 이분법의 덫에 갇힌 듯 하기 때문일거다. 하지만 크게 분하거나 답답하지 않은 걸 보면 하나는 알겠다.
이제 나는 ‘싸가지 없다’라는 말이 두렵거나, ‘싸가지 없다’라는 말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의 단계는 확실히 지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