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너 의외로 순진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사람을 믿고 여백을 남겨둔다는 거다. 험한 꼴을 겪지 않아 봐서 그런가, 라고 추측하는 의견을 듣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나는 누구든 믿는다. 여기서 ‘믿는다’라는 말의 뜻은 사람의 선의, 내면의 고유성, 성장 가능성, 소통의 여지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멍청하다!'며 화내고 실망한 적은 많지만, 어떤 사람이 ‘나쁘다’고 화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내가 분노하는 대상은 멍청함이 초래한 무책임과 사악한 결과다. 한편으로,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여기서 ‘믿지 않는다’라는 말의 뜻은, 나를 포함한 세상 그 누구도 편견, 편향, 제한된 시야와 정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
누구든 믿지만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에, 내게 서운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게 전적인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원하는 걸 주지 못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내 사랑과 신뢰를 지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흩날리는 다수의 박수갈채 따위 내겐 중요하지 않다. 내면을 가꾸고, 자신의 주체성을 행위로 증명하는 단 한 사람에게 받는 지지와 조언에 나는 백억 배의 가치를 둔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단지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나의 명예와 존엄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그런 내가 주는 사랑과 신뢰 역시 상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커버이미지 : Lovis Corinth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