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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

저잣거리의 품격

2018년 9월 9일, 페북에 쓴 글

by 김현희

(2018년 9월에 쓴 글)


중학생 때 친구들과 학교에서 김밥을 만들어 판 적이 있다. 돈을 모아 카메라를 사고 싶어 장난 삼아 제안했는데 서너 명의 친구들이 적극 찬성을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시작된 일이었다. 학교에 매점이 없었던 터라 김밥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장사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선생님들에게 금세 발각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막대기로 엉덩이를 10대 맞고, 반성문을 쓰며 내 생애 첫 사업은 처절한 폐업을 맞았다. 당시 화가 잔뜩 났던 선생님은 큰 소리로 이런저런 꾸중을 하셨는데 그중 한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여기가 무슨 시장 바닥인지 알아아아아아악!”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고 있던 중이라 이마에서 사선으로 땀이 쏟아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리던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참나, 시장 바닥이 뭐 어때서...?’


이십여 년 전 학교나 사회의 모습을 현재의 기준으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말의 맥락에 깃든 차별과 경멸의 뉘앙스는 여전히 께름칙하다.


사회 구조와 문화는 많이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난 9월 5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 대표가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 대해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저잣거리에서 토해내는 울분에 찬 성토’라는 말을 남겼다. 김 원내 대표의 연설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기괴하고 민망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상점이 늘어선 거리라는 뜻인 ‘저잣거리’라는 단어가 왜 그런 맥락으로 쓰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또 지난 8월 29일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청와대 홍보 사진 논란과 관련, '언론이 뉴스와 소설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공지영 작가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입에서 ‘소설 쓰지 마십시오’ 같은 저잣거리의 용어가 나온 적이 있던가.” 소설은 너무도 고매한 예술 양식이라 ‘소설 쓰지 말라’처럼 전 국민이 다 알고 심지어 사전에도 등록된 관용어구 조차 불경한 ‘소위’ 저잣거리 용어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참고 ⓵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설 쓴다’는 말을 고민정 부대변인과 같은 맥락으로 수차례 사용함 ⓶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러분 이거 다 소설인 거 아시죠’가 아니라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라고 함 ⓷이런 사실들과 별개로 ‘소설 쓴다’는 말이 어떻게 문학 장르인 소설을 모욕하는 것인지 어안이벙벙)


‘저잣거리’라는 말을 임팩트 있게 사용했던 다른 경우로는 2016년 촛불집회에서 터져 나온 이재명 당시 성남 시장의 발언이 있다. 그는 최순실에 대해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라는 일갈로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 바 있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속 호감 정치인 목록에서 시원하게 사라지셨다.


물론 관습에 따른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다. 내가 ‘저잣거리 아녀자’라는 말이 왜 일타쌍피로 모욕적인지 성토하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라도 나는 불쾌하다. 관습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불쾌하다.


정치인들은 선거 운동 기간이 되면 친히 ‘저잣거리’에 납시어 떡볶이나 순대 등을 드신다. 손바닥이 닳도록 악수도 한다. 그 기름진 미소 속에 비친 저잣거리 상인들은 누구인가. 연단 위에서 열렬히 외치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과 저잣거리 서민은 어떻게 다른가. ‘진보의 탈을 쓴 위선’을 고발하겠다며 지식인의 소명을 부르짖는 유명 소설가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이 위선을 밝혀 계몽하고 싶어하는 대중은 어디에 있나. 당신의 독자들은 저잣거리가 아닌 청담동 명품거리나 신사동 가로수길만 걷고 있는가. 어째서 당신들에게 저잣거리는 그리도 하찮으며 당신들이 언행의 품격을 가늠하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저잣거리의 사전적 의미는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이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서민들이 일상을 나누는 공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저잣거리의 교사다. 나는 교사로서 부족하고 부끄러운 기억도 많지만 적어도 내가 교육하는 학생들을 저잣거리 서민의 자녀와 부유한 계층의 자녀로 구분 지어 차별하지는 않았다. 만약 교실에서 학생들이 차별을 당연시하거나 조장하는 언어를 사용하면 정색을 하고 진지한 대화도 나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 소소한 저잣거리 시민이지만 무시당할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서민의 삶에 공감하지 않는 정치인과 지식인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아니 공감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있는 그대로 존중할 능력은 갖춰야 한다. 실질적 맥락에서 그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도 계층과 차별은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직시와 무비판적 수용은 다르다. 나는 학생들이 현실 변화의 주체가 되려 할 때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당신들이, 사회의 위선을 밝히겠다는 어른들이 걸림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치인의 책무, 지식인의 소명, 품격 있는 언어 운운하기 전에 당신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터무니없는 선민의식부터 버리시라. 평범한 서민들의 견해와 일상을 존중하는 언어와 태도부터 갖추시라. 당신들이 그렇게도 걱정하는 국가의 ‘품격’은 그렇게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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