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엄마

2018년, '여성의 날 기념' 엄마 포스팅

by 김현희

1. 엄마, 직장 여성


엄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맞벌이 가정이 거의 없었다. 유치원 소풍 때 나 혼자만 할머니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갔다. 7살 때 난 친구들이 할머니가 우리 엄마인 줄 알까 봐 걱정을 하곤 했다. 비 오는 날 교문 앞에 우산을 들고 서있는 어머니들 중 우리 엄마는 물론 없었다. 할머니가 우산을 가져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고학년 무렵부터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몽땅 맞으며 집까지 걷곤 했다.


엄마는 늘 바빴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몇 개씩 싸놓고 우리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퇴근 후엔 늦도록 부엌을 들락거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었다. 엄마가 쉬는 날에 학교를 마치고 오면 엄마는 음악을 듣거나,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옆에는 늘 정신없이 뭔가를 끄적인 수첩이 놓여 있었다. 엄마는 한 번도 내게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매우 다정한 성품이고, 기분이 언짢거나 피곤하면 입을 다물고 서늘해졌다. 난 엄마가 피곤해 보이면 말을 아꼈다. 엄마가 자고 있을 땐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매일 집에서 엄마가 문을 열어주면 기분이 어떨까? 아주 어릴 땐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그게 마냥 좋을 것 같지만은 않았다. 혼자 책을 보거나, 조용한 집에서 가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도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병원에 혼자 갔다. 웬만한 일은 혼자 처리하는 버릇도 생겼다. 그걸 딱해하는 어른도 있었고, 대견해하는 어른도 있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책 속 인물들과 멋진 시간을 보냈다. 자매, 형제와 묘한 유대도 생겼다. 아빠가 끓인 동태찌개도 맛있었다. 간혹 엄마는 너무도 피곤해 보였지만, 누군가의 감정을 살피려 노력하는 버릇이 나름 좋은 영향도 끼쳤다(아이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할 때 공감능력이 자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엄마도 감정이 있고, 지치기도 하는 존재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다. 물론 다른 엄마들에 비해 함께 있는 시간은 적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자주 집에 전화를 걸어 “밥은 먹었니” “뭐 하고 있니?”라고 묻는 일상적인 대화로도 엄마가 우리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비뚤고, 이기적으로 자랄 거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들은 대단한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안하무인의 괴물로 자라지는 않았다.


요즘처럼 바쁜 3월에 발을 동동 구르다 눈물까지 쏟는 동료 선생님을 본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거다. 아이 키우기 좋은 사회로 구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문득 내 기억들을 나누고 싶다. 일하는 엄마의 아이도 괜찮다고. 바쁜 엄마와 함께 했던 나의 유년기는 결코 나쁘지 않았으며, 우리 관계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었다고 말이다. (2018. 3. 9.)


2. 엄마, 말


“현희랑 먹으니까 더 맛있네.”


엄마는 나와 둘이 있을 때 조용히 자주 이렇게 말했다. 너와 함께 있으니 내가 즐겁다, 음식이 맛있다, 마음이 편안하다 등. 당연히 그런 줄 알면서 자랐다. 성인이 된 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며 비슷한 말을 했다. 그 사람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 난 학생들에게 말한다.


“여러분과 수업을 하니 정신없이 즐거웠어요.”


이미 지났지만 괜히 혼자라도 기념하고 싶은 여성의 날 그리고 엄마. (2018. 3.10)


3. 여성 vs 여성


내 사춘기 무렵부터 엄마가 했던 말이다.


“남자들이 여자와 달리 입이 무겁고, 의리를 지킨다는 말은 편견이야. 남자들 중에도 뒷말하는 사람 많고, 여자들 중에도 신의를 지키는 사람 많아. 나는 오히려 남자들의 험담과 중상모략을 많이 봤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 인격에 달린 거지. 남자가 어떻고, 여자는 어떻고 라는 말들 전혀 맞지 않더라.”


“잘난 사람은 잘난 값한다, 얼굴값 한다는 말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예전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어. 사귀던 남자가 잘 생기고, 똑똑하고, 모든 게 빠지지 않는 거야. 그게 너무 불안했대. 결혼 후 이 남자가 딴 짓을 하면 어쩌지? 그래서 일부러 다른 남자랑 결혼했대. 이것저것 마뜩잖지만 평생 자기만 좋아해 줄 것 같은 사람으로. 그 친구는 그 남편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능력한 데다 가정은 내팽개치고 엉뚱한 짓만 하고 다녀서. 일평생 땅을 치고 후회했다더라!...잘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잘난 거고, 못난 짓을 하는 사람이 못난 거야. 잘나서 잘난 값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돼. ‘잘난 값’, ‘얼굴값’이라 불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이미 잘난 사람이 아닌 거지. 그런 말들 부질없는 편견이야.”


지금 생각해도 수긍이 간다. (2018. 3.11)




커버 이미지 Egon Schiele -Die Mutter desKünstler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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