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날개

2006년 블로그에 쓴 글

by 김현희

(2006년 1월)


1.

2002년 내가 대학 2학년이 되어 얼핏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날에 나는 꿈을 꾸었다. 내 등에서 엄청나게 크고 흰 날개가 돋아나는 꿈이었는데 살이 찢어지고 날개가 돋는 장면이 그대로 보이며 꿈속이었지만 몹시 아팠다. 어찌나 생생하던지 깨고 나서도 며칠 동안이나 그 아픔이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갑작스럽게 학교를 떠나 진로를 수정했다.

그 꿈과 내 달라진 내 인생경로의 인과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몰라도..

날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꿈이다.


2.

며칠 전에 티브이 리모컨을 하염없이 눌러대는데 영화 <반헬싱>이 방영되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똑같은 부분부터 보기 시작해서 사실 전체 스토리는 잘 모른다. 이 영화에 드라큘라랑 같이 사는 듯한 미녀 둘이 나온다. 몹시 예쁜 여자들인데 변신하면 아래와 같다.


c8421-27-sickalien.jpg


얼굴만 저런 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올누드로 변신하여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하지만 몸매의 굴곡을 거의 직선 화화고 가슴의 포인트도 생략하여 변신하면 섹시하지 않고 다만 무섭다;)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아들(?)인 괴물이 저 날개 달린 미녀 흡혈귀들이랑 격투를 벌일 때, 괴물이 저 흡혈귀의 날개를 찢을 듯이 잡아당기는 장면이 나온다. 나로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한 느낌이 들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데자부?!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저런 장면의 주인공이 었던 적이 있다.

생명체의 날개를 잡아 찢는 저 몸짓. 저 퍼득거림.

날개를 뜯기는 내가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어 무엇인가의 날개를 몹시 잔인하게 찢어버리는 행위를 해본 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나는 왠지 가슴이 갑갑해옴을 느끼며 내 기억을 다급히 뒤지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보통사람들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꽤 깊숙한 편인데 샅샅이 뒤져도 저런 장면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기억이 도저히 닿지 않는 3살 이전에 내가 무언가 나쁜 짓을 했던 모양이구나...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는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내 머릿속에 섬광처럼 영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앗!!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잔인하게 날개를 잡아 뜯는 기억이 어떻게 해서 저장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백숙을 먹을 때로,

국물에 빠진 가련한 닭이 죽음과 자신의 신체를 너무 일치시키고 있어 내가 달려들어 날개를 뜯을 때 스치듯 죄책감을 느꼈던 경험 때문에 새겨진 기억의 파편인 것이다.


a.png


나는 닭고기를 굉장히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날개를 가장 잘 먹는 평범한 사람이며,

닭날개를 잡아 뜯으면서 느꼈던 참혹함과 미안함을 뇌세포 어딘가에 은밀히 새겨두는...

소. 심.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2006년 겨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