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변시지 화가

2021년 2월, 기당미술관

by 김현희

나는 평소 서정적인 자연 풍광이나 향토애로 가득한 미술 작품들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역동적 화풍을 좋아하고, 그 지역민이 아니면 이해하고 반응하기 쉽지 않은 작품에서 매력을 찾아낼 만큼의 심미안과 인내심이 부족하기도 하다. 제주도 시립 '기당미술관'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괜히 왔나 싶었다. 전통 농가가 연상되는 아늑한 시골 분위기의 입구에 자리 잡은 고리타분해 보이는 설립자 흉상도 뻔한 느낌이었다. (매번 들르는 작은 초밥집 근처에 있지 않았다면 애초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변시지의 작품들이 진열된 벽을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런 장판을 연상시키는 '황토색 배경'에, '향토적인 소재'들(바다, 까마귀, 초가, 소나무, 돌담)이, '수묵화' 느낌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따분함의 총체로군'이란 생각부터 했다. 하지만 아무 기대 없이 바라보다 움찔, 깜짝, 감탄, 감동의 과정을 순식간에 통과하고 허겁지겁 안내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변시지의 이름을 검색해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었다.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겨우 23세에 '광풍회전'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전무후무한 이력을 쌓았으나 돌연 서울로 귀국한다. 하지만 중앙 화단과의 괴리 때문이었는지 서울대 교편을 포기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다. 이는 당시 미술계의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고 한다.


"한편, 변시지를 국내 향토작가로만 규정짓는 데에는 한국 미술계의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서양미술의 급진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대전환의 시기였다. 당시 한국 주류의 화가들은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와 엥포르멜 등 추상 미술의 기법을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귀국 후 변시지는 오히려 한국 미의식의 뿌리를 찾아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고국의 풍경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출처: 안진희, 변시지(邊時志, 1926-2013)의 회화세계 연구 A Study of Byun Shiji(1926-2013)’s Paintings)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풍물, 향토적 정서에 별다른 애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내 가슴을 뛰게 했던 건 작품들이 뿜어내는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의 정서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본 어떤 작품보다 다정한 듯 묵직하고, 직관적이면서 사실적이고, 담담함 속에 휘몰아치는 격정이 있었다. 그는 바다, 까마귀, 바람, 조랑말, 초가 등을 끊임없이 그리면서도 결코 대상화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가 탐구하고자 했던 근원적 정서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과 동기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제주도를 대표하는 화가라 한다. 제주도의 독특한 서정을 표현하려 무던히 애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진정 꿈꾸고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다.” (변시지 인터뷰 중)

출처: 변시지 화가 전 생애 다룬 첫 화집 출간 http://www.opinio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476



변시지, 바람 불 때 (1984) / 이미지 출처: 아시아투데이


비행기 시간 때문에 서둘러 미술관을 나섰고 나는 내내 얼떨떨한 기분에 젖었다. 변시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강렬한 황톳빛 때문인지 고흐가 아른거렸고, 원시적인 자연의 에너지와 그리움의 정서 때문인지 고갱이 떠오르기도 했으며, 바다와 바람의 역동을 마주한 인간의 고독과 결단 때문인지 재작년 보스턴에서 봤던 윈슬로우 호머의 '안개경보'(The Fog Warning)가 연상되기도 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대가의 작품을 늦게라도 알게 돼서 영광이고 다행이다. 다시 제주에 들른다면 기당미술관부터 재방문할 생각이다.



*커버 이미지 : [서울=뉴시스] 변시지. 태풍, 1982, Oil on canvas,182x228cm (150호),71.6x89.7 in

*읽을거리 : [평론] 시대의 빛과 바람, 변시지

http://www.seogwipo.tv/news/articleView.html?idxno=367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