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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메밀꽃 필 무렵', 청소년과 애욕의 신비

평창, 2021. 08.03.

by 김현희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가 이효석의 문학관을 방문했다(평창군 봉평면). 관람객은 거의 없었고 소박한 전시물, 이효석의 생애에 관한 짧은 영상, 호젓하게 꾸민 작은 정원을 구경했다.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나도 '메밀꽃 필 무렵'을 10대 초반에 읽었다. 성인이 된 후 다시 만나면 감흥이 깊어지는 작품이나 작가들도 있는데 이 소설의 경우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어릴 때 나는 '메밀꽃 필 무렵'이 청소년 필독서인 이유에 대해 어렴풋한 의문을 품었었고 이효석 문학관에서 다시 만난 건 잊혔던 그 '의문' 뿐이었다.


'메밀꽃 필 무렵'은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운 단편 소설이다. 토착 언어로 쓰인 유려한 문장, 향토적 정서와 시적인 연출이 만나 형성한 신비로운 정조는 압도적이다. 이 소설의 서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생을 떠돌며 살아온 가난한 장돌뱅이 허생원은 20여 년 전 여름밤, 물방앗간에서 울고 있던 성서방네 처녀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단 한 번뿐이었던 그 "무섭고도 기막힌 밤"을 평생 잊지 못하고 매번 봉평장을 빼놓지 않고 들르지만 이후 두 번 다시 성서방네 처녀를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고, 허생원은 우연찮게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나 정을 느끼는데 대화를 통해 드러난 정황상 동이는 허생원의 아들인 듯 보인다. 그들은 제천으로 동행하기로 한다.


내가 중학교 때 이 소설이 청소년 필독서인 근거가 궁금했던 건 소설 전반에 흐르는 성적인 은유와 암시 때문이었다. 작가는 주인공 허생원과 그의 당나귀를 노골적으로 동일시한다. 소설 전반부에 이 당나귀는 작은 난동 끝에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낸다"며 각다귀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허생원은 낯 뜨거워하며 당나귀의 배 앞을 가란다. 이는 허생원과 충줏집 여인, 동이가 얽힌 에피소드와 병렬구조를 이룬다. 허생원은 충줏집 여인과 동이가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어서"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만 이윽고 스스로를 책망한다. "(늙은)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헐 작정이었누".


사실 이 정도를 수위 높은 표현이라 볼 수는 없다. 또 아마 이효석은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동일한 본성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10대였던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대중문화를 심각한 수준으로 검열했고 일본문화 수입은 아예 금지했었다. 별것도 아닌 비속어, 예를 들어 '빌어먹을' 같은 표현 정도가 청소년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대중가요 가사를 삭제했었다. 또 당시만 해도 '10대 청소년의 이성교제는 바람직한가' 따위로 진지한 토론이 벌어져 나는 자주 짜증이 일었다. 그런데 정작 국어 시간에는 발정 난 당나귀, 어느 보부상의 잊지 못할 첫 경험에 대한 소설을 앞에 두고 꽉 막힌 선생님의 끝없는 예찬과 일장연설을 듣고 있으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발 하나만 하세요 좀, 같은 심정이었달까.


어쨌든 이틀 전 나는 이 소설을 다운로드해서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암시와 복선을 놓는 방식, 감각적인 묘사가 뛰어난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2020년대를 사는 10대 청소년들에게 필독서로 권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일단 꺼려지는 표현들이 많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등과 같은 표현 등은 수위의 문제라기보다,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균형 잡힌 인간관이나 여성관을 드러낸다고 보기 어렵다.


내가 청소년 필독서로서 반대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랑과 관계'에 관한 소설의 관점 때문이다. 이효석 작가 자신은 ‘현대적 단편소설의 상모’에서 ‘메밀꽃 필 무렵’을 통해 '애욕의 신비성'을 다루려 했다고 밝혔다. 물론 성의 신비, 원초적 이끌림은 중요한 탐구 대상이고 이효석이 살던 시대에는 더욱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의 의도였던 '애욕의 신비'를 청소년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수십 년 간 품어온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설렘, 신비한 마법, 꿈결 같은 순간들이 사랑의 전부일까? 나는 사랑도 인위적인 노력, 인내와 시간의 세례가 가해져야 하는 예술의 한 형태라고 본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할 때 그러하듯 말이다. 사랑의 형태는 무수하지만 훌륭한 사랑을 이루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은 엄연히 존재하며 (배려, 상상, 세심함, 거시적 관점 등), 좋은 사랑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함께 한 시간과 경험이다.


만약 사랑에도 창조론과 진화론이 존재한다면, 나는 진화론의 편에 선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사랑도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랑은 도태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가족의 사랑과 관계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혈육의 정과 유전 같은 우연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공유하는 시간과 경험의 질을 더 중요하다고 보고, 가족 간에도 우정과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정과 이끌림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고양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본능과 신비가 정말 본능과 신비로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룻밤 경험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허생원의 인생과 사랑도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사랑의 원형을 하룻밤의 우연, 운명 같은 만남, 기막힌 그러나 '갇혀있는' 판타지 같은 것들에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좀 더 주체적이고, 호방하고, 현실적인 사랑관을 갖췄으면 좋겠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문학적 위상, 사회적 좌표, 교육적 가치를 다른 방향에서 재고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효석 (1907-1942)


(+) 덧붙임

이효석을 전형적인 '원히트 원더', '친구를 잘 둔 덕분'에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는 작가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나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효석의 가치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이효석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만약 그가 30대 중반이란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그의 문학 인생과 한국의 문학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효석 문학관에서 나오는 길에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메밀막국수를 먹었다. 식당 이름은 '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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