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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l 24. 2021

부적응 교사와 부진 학생

학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년 전 내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 나를 두고 '저 사람 어때?'라고 물으며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더란 거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다만 이번 경우는 다소 반전이 있다. 첫해 내가 학교의 공적 사안에 대해 질문하며 문제를 제기했을 때 내게 "김현희 선생님처럼 깨어있는 후배 선생님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호호~"라고 했던 소위 '선배'교사가 뒤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캐묻고 다니며, 내가 관리자도 아닌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고 투덜댔다는 사실이다(그분은 해당 업무 부장교사였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이전 학교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캐묻고 다니던 인물도 중요 부장직을 맡았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결국 돌고 돌아 당사자인 내 귀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굴러온 돌이지만 결국 나도 사회 관계망을 맺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알고 싶다면 시간을 두고 나를 지켜보거나, 나와 직접 대화를 해보면 된다. 스스로의 판단에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할애하나 싶어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뒤에서 '그 사람 어때?'라고 떠보며 타인의 평판 조회에 열 올리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 분들이 험담과 루머 유포의 근원인 경우가 많다. 또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공사 구분 능력, 공적인 의사소통능력도 떨어진다. 물론 세상 모두가 배포가 크고, 소통과 의제 설정의 달인일 수는 없다. 관점과 성격의 차이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학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승진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세상은 내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자주 겪다보니 한때는 '내게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눈에만 이렇게 많은 문제가 보이는 건가, 내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내가 동의할  없는 규칙들로 짜인 세계에 적응을 거부하는  쯤으로 스스로 정리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면의 번뇌가 모두 사라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찰' '불필요한 자책' 구분하는  필요한  같아서다.

 


지난 학기에 학생 두 명과 특별한 수업을 했다. 일반적인 명칭은 '부진학생 수업'인데 학교 기안에는 '○○클래스'라고 되어 있고, 우리 셋은 '화요일 수업'이라고 부른다. 몇 달간 순조롭게 진행됐고 학생들이 재미있어하는 것도 보이는데, 교실에서 20여 명이 함께 수업할 때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화요일에 내가 넌지시 물었다.  


"얘들아, 교실에서 다른 애들이랑 다 같이 수업하는 거랑, '화요일 수업' 중에 뭐가 더 좋아?

(1초의 망설임 없이) 

"화요일 수업이요."/ "저도요. 훠어어얼씬.."

"왜?"

"어.... 어.. 음... 그냥요."


우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나로서도 추측되는 바는 많았다. 일반 수업을 할 때는 모든 아이들과 맞춤형 수업을 할 수 없다. 화요일 수업에서는 이 두 아이의 수준과 흥미에 맞게 학습 내용과 방법을 조직할 수 있고, 칭찬을 주고받을 일도 많고, 아이들의 작은 반응에도 내가 즉각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다. 화요일 수업을 할 때 우리는 무려 방역 수칙을 어기고, 마스크 안으로 작은 젤리를 집어넣고 먹는 일탈(;)을 즐기기도 한다. 한 학생은 일반적인 교실 수업을 할 때 특히 눈에 띈다. 하루 종일 지우개를 자르며 혼자 놀기 일쑤이고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런데 화요일 수업이 시작된 얼마 후부터는 내가 복도를 지나가면 등을 툭 치며 무뚝뚝하게나마 인사를 한다. 내가 창문을 바라보면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학기 초에 나는 내가 이 아이와 이 정도의 감정 교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부진학생의 기준, 정의, 원인과 지원 방법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다. 사실 기초학습부진은 정말 풀기 어려운 과제이고 원인과 결과를 학교에서만 찾아서도 안된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 내가 맡은 이 두 아이들은 여건만 조성되면 얼마든지 학습 의지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학생들이다. 학습뿐만 아니라 정서적 교류와 관계 맺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빛나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한때 내가 부적응자인가 고민했고 보아하니 앞으로도, 적어도 내면만큼은 항상, 그럴 것만 같다. 하지만 여건이 달랐다면, 즉 내가 다른 구조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이상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나는 지금과 매우 다른 고민을 하며 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모든 문제의 원인을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건 편리하고 안온한 사고방식이다. 또 교사로서 나 나름의 소소한 경력과 경험, 네트워크도 쌓은 지금 스스로를 '부적응자'라고 여기는 게 조금은 엄살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있다보면 허무하고 쓸쓸해지곤 해서, 요 며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조금 달래 보았다.  


커버 이미지: Zachary Benson Friedberg-The Meetup,2021(출처: https://laluzde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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