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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07. 2021

대화 불가

차라리 혼자 달릴게

대면이든 서면이든 나는 토론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다. 호전적이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많은 성향이라 이견을 보면 피하기보다 '왜지? 혹시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껏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조율하고 공존하며 지내왔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 꽤 '강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는 편이다. 내 기준에서 볼 때 이견을 존중하고,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유연함 자체가 강함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토론은 고사하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말의 '맥락을 잡지 못하는 (혹은 일부러 흐리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내가 동성결혼 합법화 관련 입장을 펼치는데 "그런데 결혼이란 원래 불합리하고 가부장적인 제도 아닌가?"라는 말로 맥이 풀리게 하는 경우다. 또 사람은 겸양의 미덕을 갖추고 절제하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데카르트적 불안, 이성 우위론의 맹점과 심신 이원론의 한계 따위를 논하며 일상과 철학의 맥락을 뒤섞는 경우도 그렇다. 맥락과 본질을 의도적으로 호도하는 거라면 비열한 행동이다. 설사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상상력과 공감의 부재가 그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화를 통한 동반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증명과 자기 합리화에 매진할 뿐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마치 밀폐된 공간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너지를 소비하며 열심히 뛰고는 있는데, 둘 다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말이든, 글이든 요즘은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것이 독선과 아집의 벽 뿐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지식은 때로 흉기가 된다.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자들과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배운 알량한 지식이나마 저렇게는 쓰지 말자, 저렇게 나이 들지 말자, 차라리 지금 문을 열고 나가 천변을 달리자, 라고 혼자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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