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에서 트렌토를 생각하며. 2018. 8. 11
사람마다 쿨함의 정의는 다르다. 안하무인, 오만함, 예의 없음을 쿨함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용례이다. 어쨌든 쿨함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쉽지 않으므로 다소 우회해서 생각해보면. 내 경우 쿨함의 반대는 ‘절박함’이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난 느낌 같은 것들. 연애할 때 가장 스텝 꼬이게 하는 게 절박함인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고. 보통 인간 관계의 측면에서, 자꾸 상대를 통해 뭔가를 배우려 드는 자세는(가르치려는 자세 만큼이나) 쿨하지 못하다. 물론 그런 자세를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 같아 싫기도 하고, 나는 그런 류의 인위적인 절박함이 그냥 민망하다. 무엇보다 사실 배움이란 게 ‘어디 뭐 배울 것 없나?’ 두리번거리다, 좋아 보이는 뭔가를 매의 눈으로 낚아채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낯선 곳에 가서 굳이 익숙한 것을 찾아 헤매거나,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 반드시 구입해야 할 아이템 따위에 목을 매는 것은 쿨하지 못하다.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 한다. 물론 사진도 남는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남는 건 ‘여행 전과 달라진 나’. 오직 그 뿐이다.
베니스에 오기 전 트렌토에 머물렀다. 딱히 한 일은 없다. 애초 아무 계획없이 일단 덜 더운 곳으로 가자는 마음 만으로 움직였다. 물론 로마나 피렌체 보다는 시원했지만 한낮은 뜨거웠다. 첫날에는 순간 더 북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북극까지 가겠으니 정신차리자 생각하니 진정이 되었다. 작은 기차를 타고 메조코로나에서 등산을 하고, 성당들을 구경하고, 광장 앞 분수 앞에 앉아 점심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헤매인 게 전부. 밤에는 창 밖으로 산과 포도밭을 내다 보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거리는 한산하고 슈퍼마켓은 (정말 쿨하게) 하루에 딱 네 시간만 문을 열었다. 교통편이 좋지 않았지만 버스는 시계처럼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했다. 동네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어느 날인가 작은 성과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왔는데 공기 냄새가 너무 좋아 정원을 맴돌았다. 그러자 일하시던 정원사 할아버지께서 내게 라벤더를 한웅큼 건네주었다. 나는 내내 라벤더 향기를 맡으며 이보다 더 쿨한 도시가 있을까 생각했다.
왜 그 시점에서, 나는, 굳이, 베니스에 들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원래 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분명 뭔가 반드시 가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었다.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베니스는 한 번 밟고 가야 하지 않겠어?’ 라는 류의. 참으로 쿨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베니스의 미로 같은 거리에서 개 오줌 냄새가 난다며 투덜거리는 지금의 나도 쿨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 트렌토가 그립기도 하고 왜인지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