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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Feb 04. 2022

배와 비행기

1년간 내가 지역 초등 지회장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가 물었다. "왜 침몰하는 배, 추락하는 비행기에 타려고 하는 거야?" 나는 웃음이 터졌다. 더 이상 쉬쉬할 것도 없이, 지역교사노조연맹은 전교조 조합원 수를 넘어섰다. 우리 지역의 경우, 지역교사노조원이 전교조 조합원 수의 2~3배에 달한다. 나는 전교조 지도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몇 달 전 탈퇴했다가 재가입을 한 이력도 있다. 그러니 잘 안다. 선장과 항해사들이 길을 잃은 배에 탄 느낌, 이미 추락한 줄 알았는데 떨어질 허공이 더 남아있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느낌에 대해 말이다.  


친구는 내 선택을 확신하는지 물었지만, 늘 그렇듯 내가 확신 따위 있을 리 없고, '배'와 '비행기'라는 말에서 엉뚱하게도 영화 '디 아더스'(2001년, 아메나바르 감독)와 홉스테드의 '문화간격지수'를 떠올렸다. 영화 '디 아더스'에서 주인공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자신의 집을 '배'에 비유하며, 배에 물이 새는 걸 막듯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한다. 한쪽 문을 열기 전에 반드시 다른 한쪽 문부터 닫는다. 표면적인 이유야 아이들의 햇빛 알레르기 때문이지만, 그 자체가 '현실 부정'에 관한 탁월한 은유 같았다. 그리고 나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듯 한 조합에 대해 생각했다. 구획을 짓고, 눈과 귀를 닫고 오로지 자신들의 뜻과 옮음만을 강조하는 세력들이 있고, 이에 대한 중앙의 조율 능력은 부재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려면 일단 닫힌 문부터 열고, 끈기있게,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현실 감각은 가볍고 산뜻한 미디어 홍보, 대증적인 해결책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의 비유도 재미있다. 흔히 비행기 추락 사고의 원인을 기체 결함, 날씨, 기장의 실수 등에서 찾지만 근본 원인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이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가별 '비행기 추락사고 발생 빈도'와 홉스테더의 '권력 간격 지수'는 맞아떨어진다. 권력 간격 지수가 높은 나라는 부기장이 권위에 짓눌려 기장에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진다(조사 당시 한국은 2위). 즉 의사소통능력 자체가 수많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비행기 조종실과도 같다. 계기판은 수없이 많고, 조종간은 격렬히 흔들리며, 침묵이 흐르는 조종실은 비행기를 추락시킨다. 단일대오, 일로매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의 목적지는 단일한 시야로는 파악조차 할 수 없다. 내가 지난 여름 탈퇴를 할 정도로 화가 났던 시점에 나는 조직이 낡았는지, 비겁한지, 노쇠한지, 타락했는지 따위 관심도 없었고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내 입장과 경험치에서 볼 때, 조직의 '의사소통능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이 고장 난 운송수단에 올라타려 하는가, 라는 친구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나는 '전교조'라는 이름에 굉장한 가치부여는 하고 있지 않다. 영광스러운 시기에 대한 묘사는 기사로만 봤고, 솔직히 전교조를 통해 내가 가시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연결하고 성장하고 싶을 뿐인데 아직까지는, 내가 신뢰할 수 있고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이 소수나마 이곳에 있다. 복잡한 정치공학과 셈법, 그럴듯한 논평들은 지겹고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고립된 상태로는 개인도, 공동체도 성장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인데...이런 너절한 말을 내 친구가 이해할 수 있을지, 나조차 나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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