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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Feb 05. 2022

말, 글, 거짓말

타인의 해석, 을 읽다가

흔히 타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히틀러의 전쟁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던 사람은 그를 직접 만난 당시 영국 총리가 아니라, 히틀러의 글만 읽은 후임 윈스턴 처칠이었다. AI와 판사에게 피의자에 대한 동일한 증거를 제시하고, 피의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예측하도록 하는 실험 결과는 AI의 압승이었다. AI와 달리, 판사는 직접 피의자를 '대면'하고 '대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열린 토론회에 대한 말들이 난무한데, 사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토론회의 공적인 효용 자체가 의심스럽다. 물론 토론회도 필요하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명백히 한정되어 있다. 한바탕 서커스 같은 토론회나 인물 검증보다는 바람직한 리더십과 대통령 직무능력의 개념, 사회 변화 방향, 사회 곳곳의 작은 리더 양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 우리가 내리는 타인에 대한 판단은 오류투성이지만, 사람이 누군가를 전혀 판단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텐데 내 경우 가장 신뢰하는 판단 도구는 '글'이다. 나 역시 많은 판단 착오를 했고 완벽한 도구는 없음에도, 상대적으로 '글'을 읽으며 찾아온 직관 때문에 실수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내 직관을 믿지 않고 '글만 보지 말고 직접 만나봐야 안다', '만나보면 다르다'와 같은 말을 믿고 얼떨결에 판단을 유보했다가 통렬하게 후회한 경험만 있다.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내 기준에서 거짓말을 못하는 건 글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따뜻한 글에서 냉기나 외로움이 보이거나, 분노의 글에서 슬픔이나 애정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나는 글로 인해 세상 앞에 벌거벗고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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