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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n 01. 2022

해방

2022. 5. 22.

JTBC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주인공 염미정은 '해방 클럽'이란 소모임을 만든다. 사정은 이렇다. 염미정이 다니는 회사에는 직원들을 위한,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다수의 동호회들이 있다. 하지만 가입하고 싶은 모임이 없거나 개인 성향과 사정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끝없이 '행복지원센터'에 불려 다닌다. 극 중 모 부장의 말마따나 '관심 병사'가 받는 관리 상담과 비슷한 구조다. 결국 염미정은 조직의 시선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해방 클럽을 탄생시킨다. 나는 '행복지원센터'라는 말을 듣자마자 교육청의 '에듀힐링센터'가 떠올랐다. '배구'와 '친목회'가 따뜻한 학교 분위기 형성의 필수조건이라고 믿는 분들도 생각났다. 안타깝게도 나는 위로, 공감, 상담, 친목, 힐링 같은 말을 들으면 짜증부터 치솟는 인간이다.


회사나 학교만 이럴까. 다음 주 토요일인 5월 28일, 서울에서 전교조 교사대회가 열리고 그중 한 코너의 제목이 '안녕하세요 마당'이다. 본부가 150여 개의 소모임 깃발을 꽂고, 조합원들이 명목상 '자발적으로' 원하는 소모임을 찾아가 어울리는 행사다. 소모임 리스트는 사무처장들이 만들고 있고, 깃발을 들고 서있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해서 대전지부도 7명이 할당된 상황이다.


나도 소모임 조직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19년부터 2년간 페이스북 분회를 운영할 때도 소모임 조직과 지원을 위해 음악부니, 목공부니 부족하지만 나름 애를 썼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소모임의 핵심은 개인의 개성과 자발성, 지속 가능성이다. 핵심 활동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작위적인 소모임 제목을 수백 개 정하고, 지부별로 깃발 들 사람 수를 할당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소모임이 아니다. 본부가 말하는 '소모임'은 레크리에이션 조 편성 정도인 것 같긴 하다. 또 계획서에 쓰인대로, 코로나로 지친 조합원들을 위로하고, 조합원들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동원하지 않겠다는 취지도 좋다. 하지만 소모임 리스트를 중앙에서 만들고, 깃발 들 사람 수를 지부별로 할당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력 동원이다. 또 이건 개인 성향 차이겠지만,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얼굴 맞대고, 주최측이 준비한 놀이나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 나는 '행복지원센터'에 불려간 염미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물론 즐기는 분들도 있을거고, 이왕 하는 행사이니 잘되면 좋겠지만 말이다.


내 입장에서는 '페이스북 분회'나 '21세기 전교조 생활'의 소모임 깃발을 제작해달라 신청할 수 있다. 핵심 활동가들의 상상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실체가 있는 소모임이라 명분도 강하다.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하고 싶지 않다. 사실 올해 초부터 나와 모 지회장이 '21세기 전교조 생활' 운영을 위해 수차례 본부에 예산 지원 요청을 했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 평소에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꾸려서 운영하려는 소모임은 지원하지 않고, 일회성 이벤트용 소모임을 위해 수백개 깃발을 제작하겠다니 나로선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물론 일 년간 내가 맡은 일은 해나갈 거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풀뿌리 조직 활성화를 위해 중앙의 지원을 기대하며 협조 요청을 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겠다. 150개 소모임 리스트를 훑어보니 마지막에 '이런 거 안 하고 싶은 모임'이 눈에 띈다. 굳이 가입해야 한다면 그 모임이 되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까지 중앙이 깃발을 내리 꽂아 주도하는 건 내 기준에서 코미디다. 일단 나부터,

해방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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