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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1차원이 되고 싶어,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비엔나 Day1-2

by 김현희


비행기에서 (07.20-21. 2022.)


출국하는 비행기에서 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읽었다(박상영 저, 문학동네). 지방 도시 D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퀴어 정체성을 가진 10대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내가 10대 때 읽었다면 친구들이 들어주던 말던 침을 튀기며 며칠간 이 소설 이야기만 하고, 캐릭터와 스토리를 끝없이 되짚어 상상하고, 글에 등장하는 만화나 소설을 찾아보며 정신을 못 차렸을 거다. 10대들만 즐길 수 있는 유치하고 가벼운 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다. 가면을 쓰고, 자기혐오와 분노에 허덕이고, 자살 소동을 벌이고, 끔찍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모습 등이 묘사되지만 글 저변의 시선과 관점은 든든하고 사려 깊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애정이 느껴지고, 글에서 젖비린내와 피비린내가 동시에 풍겨온다. 10대들의 고통과 성장을 절절하게 그리지만 대상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은 점, 그러면서도 독자를 옭아매지 않는 적절한 '거리감'은 특히 큰 미덕으로 꼽고 싶다.

어릴 때 이런 한국소설을 정말로 읽고 싶었다. 내가 10대였던 90년대, 한국 문화계는 어른들이 멋대로 드리운 세기말의 그림자에 파묻혀 있었다. 10대들은 자기 파괴적이고, 연약하고, 오글대는 감상의 대상으로서 제멋대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또 퀴어물은 창작은커녕 외부 공급마저 차단되곤 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다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질 듯 통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렵게 구한 해적판의 화질이 성에 차지 않아 비디오 가게들을 뒤지며 발품도 엄청나게 팔았었다.


박상영 작가가 10대 시절에 자양분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화, 영화, 음악 리스트들을 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원수연의 '렛다이',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는 나도 중학생 때 즐겨 봤었다.


엇비슷한 장르에서 10대 때 내가 의지했던 소설들은 마이클 커닝햄의 '세상 끝의 사랑'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 마누엘 푸닉의 '거미여인의 키스', 정정희의 '오렌지' 등이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들은 서점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잡아서 가져왔다가 뜻밖의 명작을 만난 케이스였고, '거미여인의 키스'의 경우는 영화 잡지를 읽다가 우연히 알게 돼서 겨우겨우 구해 읽은 책이었다. 뭐 돌이켜보면 어릴 때 음반가게나 서점에서 놀다가 무심코 잡아들었다가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것들이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이갈리아의 딸들' 같은 작품들이었으니 10대 시절의 나는 황금손이 분명했다. 아무튼 마이클 커닝햄, 왕가위도 좋았지만 동시대를 사는 한국의 작가가 진작 이런 소설을 써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어린 내가 비빌 언덕이 한결 가깝고 풍요로웠을 것 같다.


원래 계획적으로 여행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이지 아무 준비를 못했었다. 그 와중에도 잊지 않은 게 이북 단말기에 책을 몇 권 담아둔 거였는데 덕분에 오스트리아까지 오는 12시간이 즐거웠다. 잘했어.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

(7.22.)

티켓

미술관들이 몰려 있는 박물관 지구 쪽(Museumsquartier) 숙소를 잡았고 본격적 첫날인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클림트, 코코슈카 등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많은데 특히 에곤 실레 Egon Schiele 컬렉션이 집중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세계 최대 에곤 실레 컬렉션 보유 미술관이다)


사실 실레나 클림트는 상업적인 이미지로 지나치게 많이 활용되는 바람에 다소 클리쉐가 된 경향이 없지 않다. 실레의 인물화는 특히 현대 일러스트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서 겹쳐 보이는 지점들도 상당했다. 당대인들에게 음울하고 기괴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감정들이 2020년대를 사는 내겐 익숙하고 담담해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실레의 풍경화들은 신선했고, 레오폴트 미술관의 모든 그림을 통틀어 내 눈길을 가장 오래 사로잡았다. 보자마자 '아니 무슨 풍경화가 이렇게 멜랑꼴리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으로는 전달이 어렵지만 기록 겸 풍경화 두어 개를 올려 둔다)

Egon Schiele - Crescent of Houses (Island town) / Leopold Museum, Wien
Egon Schiele - House Wall on the River / Leopold Museum, Wien


레오폴트 미술관의 큐레이터 페레나 군퍼는 실레가 그린 풍경이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연출된 것이라 말했다. "실레는 풍경이나 나무, 꽃에 인간적인 숨결을 집어넣습니다. 또 도시 풍경을 유기적으로 그리고자 건물을 그릴 때 여타 작품에서처럼 직선이거나 딱 떨어지게 선 처리를 하지 않았어요." 실레가 그리는 자연은 빛바랜 꽃, 시든 나무, 저물어가는 태양 등 생명의 순환을 강조한 것들이 많다. 실레는 "사람들이 한여름에 가을 나무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과 같은 우울감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묘사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처 https://www.austria.info/kr)


그의 자화상과 인물화들이 고통을 부르짖고 외친다면 풍경화들은 감정을 품은 채 담담하게 내보인다. 실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 그림들이 비교적 주목을 덜 받는 그의 풍경화란 사실이 나로서도 재밌는 지점이다.


'1차원이 되고 싶어'의 표현을 빌려 오늘의 경험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레오폴트 미술관 벽에 걸린 수많은 그림들이 뿜어내는 무게가 막막해 길을 잃었을 때, 에곤 실레의 풍경화를 만났다. 그곳에 ‘1차원의 세계’가 창조되었다. 그와 나라는 점, 그의 멜랑꼴리와 나의 멜랑꼴리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는 내게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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