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Day 3 (첫 숙소, Waltz #2)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빈 미술사 박물관'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박물관이자 ‘유럽 3대 미술관’중 하나로 꼽힌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을 중심으로 '자연사 박물관'과 마주 보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디에고 벨라스케즈, 루카스 크라나흐, 라파엘로 등 쟁쟁한 작가들의 그림과 고대 이집트 유물,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 등을 보유한 엄청난 규모이다. 나는 '동쪽의 제국'이란 명칭에 걸맞은 역사적 유물들의 정취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기는커녕, 관람 시작부터 졸리고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규모가 크다는 것도 미리 알았고, 흥미로운 그림들도 꽤 있었지만 네다섯 시간쯤을 보낸 후엔 '당분간 박물관 따윈 얼씬도 하지 않겠어!'라고 다짐하며 뛰쳐나왔다.
미술사 박물관 자체는 아름답다. 건축가 소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한 건물은 웅장하고, 계단 벽화를 그린 사람이 심지어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신성로마제국 시절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이 박물관의 기반이 된 만큼, 컬렉션의 질과 양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시차 적응 중이던 터라 전날 밤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한 데다, 이 박물관 자체가 어딘지 사람을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미술 전문가가 아닌,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추상적인 의미의) 학교에 온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런데 이곳 미술사 박물관에선 마치 입시 학원에 온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사실 입시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음;;). 학생인 내가 소화할 수 있든 말든 일단 굉장한 양의 지식이 폭탄처럼 쏟아진다.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아는 것도 많고 학력도 높다. 하지만 수업 능력과 감수성, 철학이 부족해 그들이 짠 커리큘럼, 수업은 물론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도 재미없다. 출구 없는 입시학원, 창문 없는 백화점에 갇힌 듯 가슴이 답답했던 나는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관람용 의자에 앉아 '어, 브뤼허의 바벨탑이네. 저거 봐야 하는데...' 하면서 스르륵. '벨라스케즈의 마르가리타 공주 그림이 성장기에 걸친 시리즈였구나' 생각하며 까무룩.
18유로나 냈으니 볼 건 다 보자 싶어 볼대기를 비비며 마른세수를 하고,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지하까지 관람했다. 번쩍이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보물들이 가득한 유리장 사이를 걷는데 황홀하긴커녕 '합스부르크 너네가 뭔데, 일도 안 하면서 이렇게 재산이 많았냐'는 반감이 몰려왔다. 그러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까지 날아와 졸면서 화를 내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실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참고로 지금껏 내가 본 가장 훌륭한 학교 같은 미술관은 필라델피아의 "반스 파운데이션"이다. 설립자가 듀이와 절친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은 아니었을 듯)
https://brunch.co.kr/@sickalien/49
박물관에서 뛰쳐나와 수돗물을 들이켜고, 비엔나에서는 아인슈페너를 마셔야 한다지만 닥치는 대로 스타벅스를 찾아 라테를 마시고, 마켓에서 치킨과 샐러드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당분간 미술관, 박물관, 궁전이나 성당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다. 공공수영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작은 호텔을 잡았고, 앞으로 며칠간은 수영하고 공원이나 쏘다닐 생각이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면 아마도, 기차를 타고 알프스로.
*숙소
첫 3일간 호텔 테르미누스(Hotel Terminus)에 머물렀다. 박물관 지구 및 시내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서 예약했었는데 리뷰가 좋지 않아 살짝 걱정했었다. 실제로 와보니 평점과 리뷰가 터무니없이 박하다. 나와 같은 1인 여행객에겐 충분히 넓고, 조용하고, 깨끗했다(가족 단위로는 좁을 듯). 아침 식사가 부실하다는 평이 많았는데 나는 좋았다. 여행 다닐 때 아침부터 많이 먹으면 조금 깔아져서 꺼리지만, 오늘은 체크아웃하고 숙소를 옮겨 공공수영장에 갈 생각으로 누텔라 잔뜩 바른 빵을 입에 욱여넣고, 오이와 토마토를 우적우적 씹었다.
*3일간 많이 들었던 노래 - "Waltz #2"
오스트리아 하면 '왈츠'라는데, 오스트리아 왈츠는 모르고 그냥 내가 평소 좋아하던 곡을 틀었다. 지금도 듣고 있는, Elliott Smith의 "Waltz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