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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여행을 발로만 할 수는 없어

인스브루크(7. 27-29)-알프스에서 수영하기

by 김현희

비엔나에서 인스브루크로 가기 위해 다섯 시간 정도 기차를 탔다. 창 밖 풍경 구경이 지루해질 때쯤 갑자기 한국을 떠나기 직전 온라인에서 벌어졌던 불쾌한 사건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나와 관련은 없었지만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우리는 기본적인 윤리는 지키자'라고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점잖게 말했지만 내심 지긋지긋했다. 비대한 자아와 도덕불감증, 꼰대질로 우글거리는 어떤 온라인 생태계가 말이다. 한마디 할까 싶어 기차 안에서 컴퓨터를 켰는데 마침 배터리가 없었다. 닫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5분도 지나지 않아 한숨이 터졌다. 한 발만 떨어져서 보아도, 스쳐 지나가고 말 이의 말잔치 따위에 반응하는 게 더없이 조잡하고 부질없었다.


지금 이곳에 집중하자, 내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쓰자,라고 자기 계발서에나 나올 것 같은 흔한 다짐을 하고 있자니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과 인생을 자주 비유하는구나 싶었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잠시 머물다 가는 건 매한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낄 시간도 부족하다.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과의 불필요한 접촉이나 자기 증명 따위에 힘을 낭비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짧다고 생각하면서,


인스브루크에 도착했다.

사진 출처 www.austria.info/


인스브루크는 알프스의 수도로 불린다. 알프스의 중앙에서 알프스 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알프스가 품은 곳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도시이다. 내가 오스트리아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비엔나에서 인스브루크로 넘어온 이유는 분명했다. 알프스를 보고, 알프스에서 수영을 하고 싶어서였다. 호수를 찾아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Lanser see에 갔다.


Lanser see - 사진 출처 https://www.tyrol.com/


고도 840m에 위치한 12m 깊이의 호수. 짙은 초록빛 물속으로 사람들은 첨벙첨벙 다이빙하며 뛰어들었다. 나도 조심스레 물에 들어갔지만 강렬한 햇빛 때문에 불타는 삼겹살이 되려고 해 조금 놀다가 이내 기어 올라왔다. 고개를 내놓고 대화하며 한가롭게 수영하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 풀을 뜯고 있는 고양이, 울창한 나무와 초록빛 호수를 둘러싼 알프스를 바라보는데, 문득 오스트리아에서 물만 찾아다니는 나를 조금 어처구니없게 생각하고 있는 분이 떠올랐다.


여기 앉아서


내가 작정하고 관광객이 없는 장소들만 골라다니는 건 아니다. 다만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관광에는 소질도 흥미도 없다. 어딜 가든 내 방식대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구경꾼으로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 여행하는 이유는 하나다. 외부인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여행하는 장소와 시간의 흐름의 일부가 되고 싶어서. Lanser see에서 내 여정은 더 초점을 갖추고 명확해졌다.


나와 인스브루크의 주파수를 맞춰준 멋진 호수를 뒤로하고 시내로 가서 먹을 곳을 찾았다. 오스트리아 음식의 정체성은 지금도 잘 모르겠고, 인스브루크에서 내가 가장 맛있게 먹은 건 물, 과일, 햄버거와 고구마튀김이다. 수도꼭지를 냉수 쪽으로 돌리고 잠시만 기다리면 차갑고 맛있는 물이 콸콸 쏟아진다. 여름 과일을 워낙 좋아해서 자두와 살구를 맛있게 먹었고, 스윙키친이라는 식당에서 햄버거와 고구마튀김을 신나게 흡입 후 시내를 돌기 시작했다.


개선문,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인스브루크의 상징 중 하나인 황금지붕이 보였다. 비엔나에서 미술관, 박물관만 들렀지 아직 궁전은 가보지 않아서 합스부르크 제3의 궁전인 호프부르크에 입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증축했고,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사망한 장소라고 한다. 타인의 호화로운 생활 스토리 같은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티켓

호프부르크 궁전에 걸려있는 초상화들은 시체나 인형들을 연상시켰다. 쇄골이 그려져있지 않은 어깨는 좁고 가팔랐으며, 결정적으로 초상화들의 눈이 똑같았다.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도저히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개성 빵점 초상화들이었다. 프레스코 천장 벽화, 샹들리에로 장식한 방들도 평범하게만 느껴졌다.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워낙 어마어마한 천장 벽화와 조각, 그림들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똥 누는 남자와 생식기를 드러내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아기가 등장한 그림이었다. 엄숙한 궁전 그림 한 구석에, 잘 관찰해야만 볼 수 있게 작게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조용한 궁전에서 푸하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지만 규정상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호프부르크 궁전이 명성에 비해 별거 아니란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진 찍는 걸 금지한 게 아닐까 혼자 음모론을 펼쳐봤다.


거리를 걷다가 한 갤러리에 디카프리오의 멋진 사진이 걸려 있어 홀린 듯 들어갔다.


갤러리에서 독점 판매하는 사진, Nigel Parry - Leonardo Dicaprio spilling drink, 1994-2010


사진작가 '나이젤 패리'와 '빈센트 피터'의 멋진 사진들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와 작가들 사이트도 검색해봤다. 특히 빈센트 피터의 공식 홈피에 담긴 코멘트가 좋아서 옮겨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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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don’t make a photograph just with a camera. You bring to the act of photography all the pictures you have seen, the books you have read, the music you have heard, the people you have loved.” ― Vincent Peters

사진은 카메라로만 찍는 게 아니다. 사진을 찍을 땐 당신이 그간 보아온 모든 사진, 읽어온 모든 책들, 들어온 음악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게 된다.


사랑에도, 교육에도, 여행에도 적용되는 멋진 말이다. 지금 내 상황에 맞춰 이렇게 바꿔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이동하는 행위만으로 여행이 되지 않는다. 내게 여행이란 보아온 모든 것들, 읽어온 모든 책들, 들어온 음악과 그간의 사랑을 모두 녹여, 낯선 곳과 주파수를 맞춰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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