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여행 중에 쓰고 있는 브런치 글을 본 친구가 '신나 보이더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봤다. 좋았던 일들에 대해 주로 쓰게 되는 건 당연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여행 중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의도와 별개로 많은 것들을 생략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여행이 즐겁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체코에 머물고 있다. 큼지막한 문화유산들에는 대부분 발도장을 찍었고, 며칠 전엔 간단히 하이킹을 하고 호수에서 놀겠다는 낭만적인 계획을 세웠다. 노선을 거듭 확인하며 기차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프라하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에 갔다가, 인적 없는 시골길에 쓰러져 변사체로 발견되면 어쩌나 싶을 만큼 개고생을 했다.
구글맵은 버스 하차 후 도보 30분 거리라고 안내했는데 오르막길인 데다 무지막지한 날씨 때문인지 족히 한 시간은 걸었다. 나무가 울창한 야트막한 산길을 걸으리라 기대했지만, 길고 긴 들판 길 위에 그늘 한 조각이 없었다. 한국의 습한 더위가 쪄죽일 듯하다면 유럽의 건조한 열기는 태워 죽일 것만 같다. 쉬엄쉬엄 가볍게 하이킹이나 하려던 계획이 졸지에 사막 횡단으로 변경됐다. 겨우 도착했더니 호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낭떠러지처럼 가팔랐다. 현지인들은 손발로 기다시피 내려가 벌거벗고 수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미끄러져 다칠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없었다.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이만큼 조용하고 프라이빗하진 않아도 대중적인 호수가 있다고 했다. 그냥 돌아가는 건 억울해서 하는 수 없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갔고,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반대편 오르막길을 다시 뚫고 걸었다. 넓게 펼쳐진 들판, 드문드문 보이는 성 같은 아름다운 풍경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를 박박 갈며 지도의 안내대로 도착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사방팔방 낭떠러지였다. 호수에 발이라도 담그려면 다시 족히 30분은 뙤약볕을 뚫고 걸어야 했는데 도저히 더 갈 수 없었다. 나는 절벽에 서서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씨!@#"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한국의 국격을 생각해서 참았다면 거짓말이고 지쳐서 소리 지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오아시스다'라고 위안하며 낙타처럼 횡단했던 세 시간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졌다.
프라하 시내로 돌아와 버거집에 들어갔다. 안내받은 2층이 너무 더워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식당을 나와 트램을 탔다. 프라하의 대중교통 시설은 대체로 시원하고 깨끗한 편이지만 하필 내가 그날 탄 트램은 에어컨을 틀지 않았는지 공기가 후끈했다. 유독 체취가 강한 분들의 암내가 싸대기를 때렸고,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해 객객 헛구역질을 했다. 온갖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기다시피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여행이 매사 알차고 의미 있게 꾸려지지만은 않는다. 야심 찬 계획이 헛수고로 끝나거나, 잔뜩 기대하고 도착한 곳이 막상 별 게 아닌 경우도 부지기수다. 편한 집 놔두고 왜 돈 써가며 이 개고생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도 종종 든다.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여행 사진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근사하다. 열두 시간 비행 끝에 떡진 머리, 쪼그라진 피부와 입냄새 따위를 소셜미디어에 소상히 기록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면부족 상태로 커다란 짐가방을 질질 끌며 낯선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를 때의 피곤과 불안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만남은 사람들의 흔한 로망이지만, 사실 여성 여행객에게 접근하는 사람의 9할 이상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여행 중에 낯선 사람과 말을 거의 섞지 않고, 도시의 야경이고 뭐고 해가 지면 거의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소셜미디어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편집한 앨범일 뿐이다. 편집된 앨범을 누군가의 일상생활 자체로 오해해버리면 소외감이나 뒤쳐지는 기분 등에 젖기 쉽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사람들은 묻는다. 말해봐. 어땠어. 어디가 제일 좋았어. 코스 좀 추천해줘 봐. 나는 매번 할 말이 없었고 이번에도 그럴 거다. 좋은 기억이나 에피소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많은 상황과 맥락과 냄새와 분위기들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정리하는 게 나로선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 코스를 추천하려면 상대방이 물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야 할 거다. 수영을 하고, 빨래방에서 세탁기를 돌렸던 날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누가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 여행을 할 때마다, 세탁기야말로 어떤 부작용도 없이 인류를 구원한 마지막 하이테크놀로지라고 주장했던 친구의 통찰력에 새삼 감탄한다. 심장까지 뚫을 듯 차가웠던 알프스의 물. 천둥번개와 돌풍이 몰아치면 온몸에 이불을 돌돌 감고 애써 잠을 청했던 밤. 카프카 뮤지엄의 젖은 먼지 같은 냄새. 작은 서점에 들어가서 손에 잡은 책 'The Castle'. 프라하 수영장에서 갑자기 한 소녀가 다가와 "I think you are really pretty"라고 말하며 지었던 표정이나 귀여운 소년들이 악수를 청했던 일 등. 뭉실뭉실 떠다니는 덩어리 진 기억들은 말로 표현하는 순간 쪼그라져버린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죽자 살자 사진을 찍듯 나는 메모를 남기지만, 순간과 기억들을 글로 모두 잡아내겠단 건 어차피 망상이다. 더구나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이 미완성이지 않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았던 악몽 같은 기억이 결국 어떻게 내 안에 자리 잡을지, 설레던 모든 순간이 어떻게 희미해져 갈지 누구도 모른다. 기록하면 할수록 한 가지만 확실해진다. 가장 붙잡고 싶은 것들은 반드시 옅어져 간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건 글이나 사진, 소셜미디어 따위에 담아낼 수 없는 '그 밖의 것들'이다.
영미에게, 프라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