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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Dec 04. 2022

허덕이지 말자

국민의례가 시작되면 나는 가만히 서서 딴생각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참교육 행진곡'을 부르며 팔을 흔드는 것도 어색해서 하지 않는다. 하는 분들에 대한 반감은 전혀 없다. 내게 강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엄숙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자연스레 유체이탈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2박 3일 아람단 캠핑을 갔다. 캠프파이어 활동 중 조교들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구슬픈 음악을 깔더니 하늘과 같은 부모님의 은혜를 설파했다. 한여름인데도 닭살이 돋아 나는 팔을 벅벅 긁고 있는데 캠핑장은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친구들이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공중전화기 부스로 달려가 엄마를 찾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혹시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거나, 인간적인 교류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나는 건조한 영화나 다큐, 기사나 철학 책 등을 읽다가 으앙 운다.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엄숙주의를 못 견뎌하는 건 타고난 내 성정인 것 같다.  


다른 경험과 성향을 갖춘 사람들이 들어서면, 혹은 나처럼 이상한 인간이 지부장이 되면 당연시했던 어떤 것들이 조율의 대상이 될 거고 그건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또 어떤 분들이 우려하시는 대로, 나는 투쟁이나 집회에 적극 참여하는 기동력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떤 기준에서 보면 연대의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닐 거다. 물론 그 말도 맞는데, 나로서도 연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연대를 당위나 인간적 연민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구조화하는 일이다.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가끔은 과거의 기준에 맞춰 재단당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해받는 기분이 드는 건 상대방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부장 출마 과정에서 노동조합 전임 휴직 기간 '호봉승급과 경력 인정'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돌면서 잠깐 혼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 선배 선생님은 호봉과 경력 인정을 고려하는 우리들에게 놀랐고(비난조는 결코 아니었음), 나는 걸출한 활동가가 전임 휴직의 조건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정도로 처우에 무심하단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의 희생정신에 존경심이 드는 한편, 우리 사이에 안개 자욱한 심연이 놓인 것 같기도 했다.   


이전 세대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려 한다. 그들 덕에 우리가 누리는 것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과거에 짓눌리고 싶지는 않다. 선배들은 '조직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리라!'는 결의로 살아왔지만, 나는 그렇게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고, 내 이후 세대에겐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를 함께 외치면 가슴이 터질 듯 충만해지는 사람과 행진곡 가사가 너무 비장해서 졸도해버릴 것 같은 나 같은 사람이 얼기설기 얽혀 돌아갈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잣대에 얽매이지 말자. 외부에서 세운 기준을 만족시키려 허덕이지 말자. 형식에 집착하지 말자. 상황에 끌려가지 말고, 소신껏 주도해가자. 


일요일 아침부터 끄적이는 또 하나의 다짐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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