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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25. 2023

파란색 원피스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 반대

한국 기준에서 보면 나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그 흔한 빨간 티를 한 번도 입지 않았다. 4년 후 독일 월드컵 기간에 나는 초등학교에서 교생실습 중이었다.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있던 날, 학교에서 교생들에게 빨간 옷을 입고 오라고 지시 혹은 권유했다. 다음 날 60명 실습생 중에 빨간 옷을 입고 오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새파란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날 보고 사람들은 온몸으로 반항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냥 멋쩍게 웃었다.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민족을 주제로 흥분하고 몰입하는 모습이 낯설고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발 나를 건드리거나 '너는 왜?'라는 눈빛을 보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 민족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민족'이나 '국익'과 같은 말이 구라이자 허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번 강제동원 배상안을 두고 버튼이 눌리는 지점은 제각각일 것이다. 민족주의, 경제적 실익, 한미일 동맹, 굴종 외교, 친일파 매국노,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 같은 말들 중 솔직히 내가 따라 외칠 수 있는 구호는 하나도 없다. 내가 버튼이 눌린 지점은, 정부의 이번 배상안이 '피해자 중심주의'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는 것, 국가가 구성원을 보호하기는커녕 도구화해 역사의 하수구로 흘려보내려 하는 모습이다. 정부가 국익이란 칼을 들고 피해자들 앞에서 추는 망나니 칼춤이 너무나 기만적이고 잔인해서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강제동원 배상안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어쩌면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관’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시간이 없어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어제 본부가 각 지부별로 각자의 생각을 담아 성명을 쓰자는 제안을 했고 그 제안에 동의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민족과 국가 개념이 아닌 다른 지점에서 버튼이 눌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기록해 두고 싶었다. 공부가 부족한 데다 시간에 쫓겨 내용은 부실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썼다, 파란색 원피스를 다시 마음에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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