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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04. 2023

교권 사수가 아니라 교육권 '생성'이다

교육희망 기고글 (2023. 05. 16.) 

급진적 학생 인권운동가들은 ‘교권’을 권위주의나 교사의 자의적 권력과 동일시한다. 일체의 권력적 요소를 부정하며 교권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교육권 부재로 인한 현장교사들의 불안과 소진을 볼멘소리로 치부하기도 한다. 일단 나는 권위주의적인 한국 사회와 학생 인권 실태를 고려할 때 이런 목소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사상의 자유 측면에서라도 그 신념을 존중한다. 다만 교육 현실의 맥락에서 보면 동의하기 어렵다. 


과거 교사들이 휘둘렀던 권력은 '교권'이 아니다. 그들의 권력은 야만적 시대의 반영이자 부패한 폭력에 불과했다. 인간을 교육하는 활동과 동물을 길들이는 원리는 다르다. 나는 ‘교권이 추락했다’라는 표현을 혐오하며 일부러 ‘교육권’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민주주의의 원리'와 '교육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교사의 정당한 교육적 권한.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교육권의 방향이다. 이런 맥락에 비추면 한국에서 교권은 추락한 게 아니라 존재한 적도 없었다.

 

교육권의 포기는 교사로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없다. 교사의 권위와 권한은 교육적 상황과 맥락, 의미를 발생시키고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교사가 어떤 권한도 없이 교육적 결정을 이끌고 집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교사의 권위주의적 태도나 권위주의적 문화는 배척해야 하지만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권위는 필요하다. 


교육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가르칠 내용의 ‘선정’과 ‘평가’에서부터 학생과의 ‘관계’, ‘정책’,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현상에는 정치의 역동이 나노 단위로 녹아 있다. 교육의 정치적 속성과 맥락,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교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권한의 포기는 무책임의 다른 말이다. 


현재 일군의 진보 교육 운동가들이 '교권이 진보적 교육운동의 의제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엇이 진보적인가?'라는 질문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무엇이 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무엇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힘을 가진 주체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가, 무엇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에 더 관심이 간다. 관점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현재 일부 진보 교육 운동가들이 '교권'을 둘러싼 이분법적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 않나라는 우려는 있다. 낡은 언어와 해석에 갇힌 질문은 진보적이거나 참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교육권은 사실상 누가 봐도 산뜻한 진보적 의제로 보이긴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권의 의미가 합의된 적이 없다. 즉 교육권 논란은 기존의 것을 ‘사수’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새로운 의미의 ‘생성’으로 볼 여지가 있다. 교육권 의제가 새로운 투쟁과 토론을 격발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교육권이 진보적 교육운동의 틀 안에서 의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우리의 과제는 외줄 위에 놓인 교육권 의제를 이끌 섬세한 정치력을 갖추는 것, 비난과 공격의 언어를 넘어 ’가능성의 언어와 장소‘를 찾는 일이다.      


https://news.eduhope.net/25204?fbclid=IwAR2Yj41ODT_1O2Vollf6HVTME82iIY_Qev4cipVv-f-Mmjg58CIUPlCYc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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