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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y 07. 2023

믿음이 부재한 곳에서

아동학대 처벌법 개정 관련 

아동학대 처벌법 개정 관련 자료를 뒤지다가, 수학여행 학생 인솔 과정에서 아동학대로 피소당한 교사를 위해 5년 전 5월에 썼던 탄원서를 우연히 발견했다. 탄원서 내용 중에 이런 문구가 있다. 


“루소는 믿음이 부재한 곳에서 개인은 사회 현상에 무심하고, 둔감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법과 제도가 우리를 지켜주리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교사들은 생존을 위해 무심하고, 둔감해지리라 확신합니다.


실제 교직사회는 둔감해지다 못해 우울해졌고 익명 커뮤니티만 악에 받쳐있다. 윤리적 잣대만 들이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법과 제도의 미비가 일부 구성원들의 문제행동, 관리자의 무책임, 교육당국의 무능함과 결합해 교육현장을 마비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3월부터 전교조는 학교 내 아동학대 사안 처리 개선을 위해 “50만 교원의 교육활동 보장을 위한 초중등교육법,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처벌법 개정 서명 운동”을 벌였고 참가자가 5만 명을 훌쩍 넘겼다. 국회 교육특위장인 서동용 의원은 법안 개정과 국회토론회 추진에 대해 전교조와 합의했다. 올해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다음은 5년 전에 썼던 탄원서. 


<탄원서>


안녕하세요. 대전 초등교사 김현희입니다. 초등교사 일을 하다 보면 학생들의 용변, 콧물과 토사물 같은 각종 분비물에 다소 익숙해집니다. 저는 주로 고학년을 맡아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편이지만, 작년에는 한 저학년 학생이 화장실로 급히 뛰어가다가 교실 앞 복도에 변을 흘리고 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현장학습이나 학교 내에서 토하는 학생들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들이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교사들 특히 초등교사들은 이번 현장학습 사건이 정말 남일 같지 않습니다. 초등 교사로 일하다 보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해당 선생님께서 모든 대처를 완벽하게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버스 안 상황에서는 그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모든 노력을 다하셨지만, 학생을 성인에게 인도하지 않은 채 떠난 점은 (학부모가 학생을 두고 가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분명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정황을 분석해 책임 소재를 따져도 해당 선생님이 직장을 잃고, 앞으로 10년간 교육계에 발을 붙일 수 없을 만큼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이 아동복지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은 주지할 만한 사실입니다. 아동복지법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개별 사안에 대한 법 적용과 해석은 공정하면서도 섬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금형으로도 10년간 교원자격이 완전히 박탈되는 현 법 체계 아래서, 이번 사건에 반드시 ‘아동학대’ 혐의를 적용해야 하는지 저는 깊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애초 그 선생님을 아동학대로 신고한 해당 학교와 교육청에 먼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번 사건의 판결은 초등현장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분노와 무력감에 빠진 일선 현장에서 현장체험학습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계획했던 모든 교육활동이 위축될 것입니다. 


루소는 믿음이 부재한 곳에서 개인은 사회 현상에 무심하고, 둔감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법과 제도가 우리를 지켜주리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교사들은 생존을 위해 무심하고, 둔감해지리라 확신합니다. 법과 제도가 인간 사회의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법은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해야 하지만, 개별 인간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무쪼록 너그러움과 상상력을 발휘하시어 현장 교사들이 자유와 신뢰 속에 학생들을 위해 마음껏 헌신할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탄원인 김현희

201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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