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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22. 2023

40년 후에

2023. 10. 09.

요즘 내가 힘들어 보이는지 선생님들이 비타민, 치킨, 자몽청 같은 음식을 보내 주신다. 모두 나름의 삶의 무게를 이고 지고 있을 텐데 나한테까지 마음 써주시는 게 감사하면서도 면목이 없다. 혹시 내가 필요 이상으로 앓는 소리를 하거나 고통의 크기를 과장하고 있진 않은지 고민이다.


8월에 조금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좋아하는 여행은커녕 하루도 휴가를 내지 못해 에너지가 고갈되어만 갔다. 서이초 사태 이후 우리에게 쏟아진 공격들, 학생인권 강조로 교사 등에 칼을 꽂았다는 무시무시한 말의 화살들, 자발적 집회를 방해했다느니 조종했다느니 하는 낭설이 조합원 탈퇴로 이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우리 사무처장님에게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학교가 천국이었네. 차라리 이렇게 조직이 망해서 학교로 돌아가버리면 쉽겠다하하하!' 지금은 탈퇴자 수 이상으로 가입이 늘었지만 전망은 어두웠고 어깨는 무거웠다. 교권 문제 관련해 선배들을 잠시 원망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부질없고 유치한 투정이다.


추석 연휴땐 동생 부부와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나를 곰모라고 부르는 23개월 된 조카가 입을 열 때마다 빛과 웃음이 쏟아졌다. 밤에는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다시 뒤적이고, 몇 달간 묵혀뒀던 책 '미끄러지는 말들'을 단숨에 읽었다. 몰랐는데 마침 저자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낄낄 웃으며 시작했는데 마지막 챕터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에게 '모든 것이 너무 고맙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밑도 끝도 없는 나의 말을 그 '자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서울 본부에서 교권 강사 교육을 받고, 이틀 연가를 내고 오키나와로 날아왔다. 여행이라기보다 배우자에 의한 강제 이동에 가깝다. 배우자는 나를 어떻게든 대전 땅에서 떨어뜨려 놓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는 30미터 깊이의 바닷속을 헤매고,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내거나 이렇게 메모를 끄적이는 중이다.


나는 꼬박 40년을 살았다. 80년 정도는 산 것 같은 기분인데 어째서 내 나이가 아직도 사십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잘 살아온 것인지 내 인생이 앞으로 어찌 흘러갈지 전혀 모르겠다. 여하튼 현재까진 꽉꽉 채워 남김없이, 후회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소중한 가족, 소수나마 돕고 싶다는 귀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난 정말 행운이다. 실상 내가 부족한 점이 많아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내일 귀국이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오로지 남색 바다와 하늘뿐이어서인지 지난 10개월이 모두 재밌는 추억 마냥 내 머릿속에서 재편되고 있다. 앞으로 40년을 더 살고 나면 2023년도의 일들이 내게 어떻게 반추될지 모를 일이다. 누추했던 감정들은 이곳에 모두 던져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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