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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13. 2024

교사들의 ‘조용한 사직’이 시작되었다

민들레 (2024년 봄호 Vol 151)

이 글은 "민들레 (2024년 봄호 Vol 151): 우리는 왜 이기는 일에 삶을 낭비할까"에 실렸습니다. 


나의 조용한 사직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문득 깨달았다. 어떤 교사들은 오후 시간에 매일 티타임을 갖고도 칼퇴근을 했다. 당시 나는 30학급이 넘는 제법 큰 규모의 학교에서 일했는데 나를 비롯한 소수의 저경력 교사들만 ‘소위’ 기피 학년과 기피 업무라는 독박을 쓰고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티타임은커녕 학생들이 하교한 후에도 숨 돌릴 틈 없이 업무 처리를 하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퇴근했다. 물론 다음 날 수업을 제대로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신규 시절에는 나의 업무 처리 속도가 문제라고 생각하며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수업과 학생 지도에도 열정을 쏟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젊은 교사라고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점점 허무해졌다. 에너지의 8할을 교육활동과 학생과의 관계 맺기에 할애하고 2할을 행정업무에 쏟아도 교사로서 평가의 지표가 되는 건 그 2할이었다. 성과급 기준안 마련 시기가 되면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 여지없이 논쟁이 벌어졌다. 조잡한 싸움 끝에 도출된 깔끔한 성과 기준안은 교실 안에서의 노력을 부질없는 노동처럼 보이게 했다.


물질적 보상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남들보다 업무 좀 더하고 낮은 등급을 받더라도 교사라면 학생의 성장과 교육 전문성 신장에서 오는 만족감만으로도 보람이 있지 않겠냐고 말이다. 교사로서의 보람이 내적 동기와 전문성 향상, 관계에서 오는 건 맞다. 어떤 교사들은 오직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등급, 지표, 주위의 인정보다는 ‘체제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그 지표들은 교사로서의 능력과 전문성에 관해 학교와 교육계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암시하는 ‘시그널’에 가까웠다. 두 번째 학교로 옮긴 후에 학교 체제의 불합리함을 다시 한번 느낀 나는 교육 정책, 학교 시스템 그리고 선배 교사 그룹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학교가 바라는 ‘일꾼’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좋은 교사의 모습은 일치할 수 없었다. 순응하면 호구되기 십상이란 위기감마저 들었다. 주어진 업무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조용한 사직’이란 말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꽤 오랫동안 교직에 조용한 사직을 고했다.     


교직 사회의 협력을 가로막는 체계     

2023년 여름, 수십만의 교사들이 거리에서 교육활동 보호와 생존권 보장을 외쳤다. 학교 붕괴의 실상이 처음 사회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사실 교직 사회가 붕괴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언론은 주로 학생의 문제행동과 일부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을 교권 붕괴의 원인으로 꼽았다. 물론 이는 서둘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하지만 학교라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면, 즉 학교가 내부적으로 단단한 체제와 결속력이란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면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문제 행동이 교사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직 사회의 파편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이는 교사들 개인 성향의 문제로 볼 수 없다. 학교 내 명확한 ‘체계의 부재’가 파편화를 유도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학교 구성원들이 체제를 신뢰하고 결속하게 할 구조적 근거, 이유, 동기가 없다. 앞서 얘기한 내 경험에 비춰 저경력 교사들 입장에서 학교를 바라보자. 일부 선배 교사들은 저경력 교사들의 두 배에 이르는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저경력 교사보다 수업을 더 하거나 난이도 높은 업무를 맡는 건 아니다. 비교적 합리적으로 운영된다는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수업 시수와 업무를 동등하게 나누려 하지만(따지고 보면 이것도 공정하다고 보긴 어렵다) 저경력 교사들에게 기피 업무나 보직을 주는 경우도 많다. 


선배 역할을 해야 할 관리자의 역할과 책임은 모호하기 그지없고, 학급에서 일이 벌어지면 책임지는 사람은 결국 담임 교사다. 저경력 교사들은 선배 교사들과 비슷한 수업 시수와 업무를 배정받거나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최저 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차등 성과급은 교직 공동체를 무너뜨린 주범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저경력 교사들 입장에서 보면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더 높은 등급을 받는 차등 성과급의 논리가 ‘차라리’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고경력 교사들에게도 학교는 녹록지 않다. 2024년 3월 1일 자 명예퇴직을 신청한 교장, 교감, 교사 수는 역대급을 기록했다. 17년 차 교사인 나도 명퇴가 가능한 시점을 헤아려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중견교사로서 책임을 느껴 학교에서 중책을 맡아도 승진에 뜻이 있지 않는 이상 돌아오는 보상은 뚜렷하지 않다. 책임이 많아진다는 건 민원과 소송에 노출될 위험도 커진다는 뜻인데, 저경력 교사에게든 고경력 교사에게든 학교와 교육청은 든든한 울타리로 자리 잡지 못했다. 


학교에는 체계적인 멘토나 사수 시스템이 없다. 학급 간 칸막이 문화도 심하다. 중견 교사랍시고 다른 교사 일에 함부로 참견하거나 충고를 하면 꼰대 소리를 듣거나 교권 침해로 비난받을 가능성도 있다. 고경력 교사들 입장에서도 학교는 사명감을 발휘해 비중 있는 역할을 맡거나 선배 교사로서 후배들을 돌볼 이유와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부 선배 교사들이 ‘요즘 젊은 교사들은 알아서 잘한다, 우리보다 낫다, 우리가 배워야 한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참담한 심정이 된다. 전문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구, 경험, 사유 등을 통해 성장한다. 학교에서 수십 년을 일한 교사보다 이제 갓 입직한 교사들이 더 잘 해내는 일을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 스스로 자신을 교육의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일을 더 잘하고, 그래서 기피 업무를 도맡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면 굳이 호봉제라는 임금 체계를 택할 이유도 없다. 교육 전문성의 핵심이 젊은 감각과 순발력 같은 요소에 불과하다면 고경력 교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학교를 떠나는 것이 사회와 학교를 위하는 길이다.


학교에는 경력과 처우에 맞는 업무 체계, 관리자를 포함한 선배 집단의 정당한 권위와 역할이 필요하다. 그래야 학교가 교사들이 전문가로 성장하는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 현 시스템에서는 구성원들이 학교를 믿고 협력할 이유, 교육 전문성을 향상시킬 이유가 없다. 업무나 학생이 원칙과 전문성의 기준 없이 폭탄 돌리기 식으로 배정된다면 누구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무’체계인 환경에서는 무책임해지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각자 알아서 잘하므로 알려줄 것도 없다’는 자기 위안과 방관이 낳은 현실은 각자도생의 학교, 젊은 교사들의 잇따른 죽음과 소진, 탈출의 욕망뿐이다.      


보신과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교육부      

지난여름 교사들의 대규모 집회 이후 정부는 여러 가지 교육활동 보호 대책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에게 가장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진 조치는 담임 수당과 보직 수당 인상이다. 대통령은 교사와의 간담회에서 담임 수당 50%, 보직 수당 100% 인상으로 교사들의 사기 진작을 꾀한다고 말했다. 20년째 제자리였던 수당은 당연히 인상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발표를 한 대통령이 교사들의 박수를 받는 장면을 보고 나는 발끈하고 말았다. 장기적 전망이 필요한 공무원의 보수 협상이 깜짝쇼처럼 이뤄졌다는 점, 그리고 학교의 문제가 오로지 학생의 문제행동과 학부모의 악성 민원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정부의 유체이탈 관점 때문이었다.  


내가 볼 때 교직 사회 황폐화의 가장 큰 주범은 교육부다. 요즘 교사들은 ‘공동체 정신이 없다’, ‘이기적이고 헌신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도 있지만 내가 볼 때 학교를 헌신하거나 협력할 필요가 없는 공간, 헌신할수록 성장이 아닌 소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만든 책임은 교육당국에 있다. 익히 알려진 차등 성과급과 교원 평가의 폐해는 차치하더라도 교육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각종 전시행정을 벌이며 성과, 행사, 치적 쌓기에 몰두해왔다. 때문에 학교 현장의 업무는 나날이 늘어가는데 설상가상 교사 정원은 감축되고 있다. 교사들 사이에는 업무와 절차에 질식할 것 같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중이다.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교사들로서는 협력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중앙 정부의 업무 방식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주먹구구 행정의 극치를 보여준다. 학교의 상황과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임시로 외부 인력을 채용해 학교를 ‘성과의 장’으로 만들기에 급급하다. 교사 간담회 과정에서 학교폭력 사안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대두되자 정부는 느닷없이 위촉직 형태로 퇴직 교원과 퇴직 경찰을 전담 조사관으로 고용해 교육지원청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학교 구성원들과의 토론, 체계적인 정책 연구를 통해 근본적인 해결을 꾀하려 하지 않고 외부 인력부터 채용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늘봄학교는 학교 구성원들의 반발이 극심한 정책이다. 교육부는 역시 별도의 인력 활용 체계를 구축해 늘봄강사에게 시간당 7만 원을 지급했다. 늘봄교실의 일환인 새봄교실 지도 수당은 4만 원이고 그 와중에 정규직 교사의 보결수업 수당은 시간당 1만5천 원이다. 교사들에게 막대한 업무 스트레스를 안기는 돌봄 업무, 학교폭력 담당 업무 등에는 수당조차 지급하지 않는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주먹구구 행정 운영 속에서 오히려 정규직 교사들의 노동 가치는 무시되고 있다. 정부는 이미 황량해져버린 학교 내부에 정규직, 비정규직, 공무직 간 경쟁과 갈등, 반목의 씨앗을 심고 있다.     


이미 시작된 교사들의 조용한 사직 행렬       

저경력 교사들이 제도적 보호, 관리자와 고경력 교사들의 조언과 격려 속에 성숙한 교육자로 성장할 수 있는 협력적인 시스템 구축은 지금으로선 꿈같은 그림이다. 멀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공동체 정신은 듣기 좋은 말과 구호에서 움트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신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체제 구축이 먼저다. 공교육 기관으로서의 경력, 전문성과 체계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학교의 업무 총량을 제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합리적인 분업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도 현실적 대안이다. 교육과 행정을 이원화해 교육활동에 매진하는 교사와 교무행정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교사를 순환보직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교사 개인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전문성 기준이 아닌 학교가 시키는 대로 혹은 폭탄 돌리기 방식으로 일을 나누는 무책임한 분업 방식은 교사의 소진과 분열을 야기할 뿐이다.


교사에게 협력과 헌신을 기대하는 건 지금으로선 다소 한가한 요구다. 현재의 차등 성과급과 교사 승진제도는 수업과 생활지도라는 교사의 핵심 직무를 오히려 뒷전에 두게 만든다. 본업에 충실하지 않을수록 보상이 커지고 경쟁에서 이기는 기이한 제도다. 교원평가 역시 교육의 질 향상에 효과가 없다. 극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부적격 교사를 퇴출시키는 기능조차 작동하지 않고 있다. 막연한 공동체 정신 함양을 부르짖기 전에, 핵심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교사들에게 적절한 처우와 보상을 제공하고 교사로서 능력과 자질이 부족한 이들에겐 적절한 지원과 재교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최근 부각된 교권 문제는 내부의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땜질식으로 남발하는 처방과 선언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교권 4법과 아동학대처벌법이 개정되고 정부가 각종 교육활동 보호 대책을 발표했지만 현장은 어떤 변화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교사들의 이직과 겸직 비율은 가파르게 늘고 있으며 고경력 교사들은 명퇴할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눈에 보이는 사직만이 문제가 아니다. 교직 사회를 내부로부터 재건하지 않으면 이미 시작된 대규모의 ‘조용한 사직’ 행렬을 막을 길이 없다. 가르칠 의미와 이유를 상실한 교사들의 방황과 절망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와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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