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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Apr 04. 2024

뼛속까지 (책임의 방식)

2024. 03. 31.

나는 일반대 사회과학부, 교대 사회과 출신이고 실제로 뼛속까지 사회과다. 내 사고방식의 키워드는 '공공성, 책임, 권리, 의무, 자치, 시민성,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다. 물론 '공감, 경청, 치유, 회복' 같은 주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게도 그러한 지원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다만 그런 주제가 내 성향상 다소 사적으로 느껴져서 공적인 자리나 관계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매사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며 살뜰히 챙기고 보살피는 능력을 가진 분들을 보면 신기하고 존경스럽다.   


수년 전 내가 새 학교로 전입했을 때, 나를 두고 '보통 센 사람이 아니다'라며 말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시간을 두고 가까이서 나를 지켜본 선생님, 이제는 그냥 친한 동생이 된 선생님은 당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회상하며 지금도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알고 보면 김현희가 제일 착해. 무서운 사람이라니 다들 웃기고들 있어 하하하!"... 어떤 분들에게 나는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막상 학교에서 일이 터지자 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타인을 돕고자 총대를 메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결국 나였다는 거다. 


쑥스럽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개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몰입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전체 그림 속에서 '상호작용과 영향'을 파악하고 공공의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능력 역시 중요하다. 나는 '감정적 공감' 못지않게 중요한 '인지적 공감'을 발휘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왔다. 공동체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끝은 결국 파국이다.  


전임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내고 있는 정책실장님은 내가 리더로서 최적화된 인간이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판단력, 실행력, 결단력 같은 것들을 꼽으시지만 내 특유의 과단성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겸허히 인정한다. 사실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나는 완벽한 리더가 아니고 완벽한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공과 사 모든 면에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 갈 길이 멀다.  


다만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겪어온 학교, 그리고 사회는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보상은커녕 충분한 관심과 인정의 빛조차 쬐어주지 않았다. 기피 업무 혹은 교사의 업무라고 보기 어려운 일들은 그 조직에서 '거절을 가장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곤 했다. '소위' 착한 이들에겐 끝없는 책임, 헌신, 희생만 요구되고 오로지 개인의 ‘권리’에만 집중하는 소수가 조직의 공공성을 훼손해도 리더는 권한과 책임을 방기하고, 이로 인해 공동체를 향한 구성원들의 신뢰와 사기가 저하되는 모습을 학교에서 무수히 목도했다. 어찌 보면 만국공통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적어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동안 만큼은, 내 권한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밝은 빛을 쬐는 방향으로 행사하고 싶다. 책임을 다하며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조직은 지켜보고 있으며,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신호가 발산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다. 내 철학과 실천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가피한 출혈은 내가 안고 간다. 그것이 부족하나마 지금 단계에서 내가 실현하는 책임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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