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Apr 21. 2024

범준과 이야기

범준은 뛰어와 나를 안는다. 그리고 견과류 봉지를 흔들며 외친다. "고모! 우리 기차를 만들까?"


우리는 우선 말린 블루베리, 크랜베리, 건포도로 기차를 만들고 비슷하게 생긴 세 과일이 어떻게 다른지 논의하며 하나씩 입에 넣는다. 호두는 '뇌처럼 생겼지, 먹으면 머리가 좋아져', 아몬드는 '딱딱하지만 공룡은 딱딱한 음식도 잘 먹지', 캐슈너트는 '똑 쪼개서 나눠 먹자!'같은 이야기를 의식처럼 반복한다.


범준은 내 무릎에 앉아 손 닦는 걸 좋아한다. 물과 비누를 만지막거리며 우리는 하염없이 종알댄다. '물은 소중해, 아껴서 써야 해', '바다에는 물이 많지, 고모부는 바닷속에 들어가 망치상어와 거북이를 만난다, 범준이 자라면 고모부랑 같이 바다에 들어가 착한 상어를 만나자'... 범준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 나를 꼽는 것은 아마도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범준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나는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범준의 조부이자 나의 부친은 얼마 전 2-3개월의 생이 남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 2살 반인 범준은 앞으로 조부를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누워있는 시간이 일상의 대부분인 조부가, 여전히 범준을 볼 때만큼은 얼마나 환하게 웃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범준에게 과자를 줄 때마다 '몸에 좋지 않다'며 옥신각신하던 나의 모습, 범준이 태어난 후 부쩍 우리에게 '너희가 자랄 때 너무 엄격하게 대한 것이 후회된다, 부모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라고 털어놓는 그의 회한도, 범준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가족에게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와 부친 사이에 범준을 끼워 넣어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이 방어기제라는 걸 안다. 나 역시 대면하기 두렵다는 걸 안다. 하지만 네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 너는, 너는...


네 조부 인생 마지막의 가장 큰 기쁨이다. 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자주 만나고 무척 많이 웃는다. 네가 좋아하는 농장, 조부가 퇴직 후 마련한 작은 농장은 관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네가 자연 속에서 뛰어놀 공간을 주고 싶은 바람으로 유지된다. 이제 2살 반인 너는 작은 일에도 '고마워'라고 말한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너를 향해 품은 마음의 메아리이다. 나는 네게 들려줄 이야기 속에 그를 새겨 넣을 것이다. 작은 너는 가장 큰 사랑이다. 가장 큰 이야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뼛속까지 (책임의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