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_2024-04-15
'심판'은 정치와 교육의 언어가 아니다
잠시 교실을 떠나온 지 1년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사다. 30개월 된 조카와 놀 때조차 나도 모르게 ‘활동’을 구상해 실행한다. 갖가지 사회 현상을 교실 상황과 어떻게 접목할지 고민하고, 수업 자료로서의 가치와 가능성을 헤아리는 습관 역시 여전하다.
22대 총선 기간 내내 이번 선거의 교육적 가치를 고민했다. 공교육의 명시적 목표는 민주시민 양성이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야말로 풍부하고 역동적인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자의 관점에서 이번 선거는 수업 자료로서 낙제점이다. 타산지석의 백과사전식 사례집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
22대 총선의 키워드는 ‘심판’이었다. '심판'하기 위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위성정당이 용인됐다. 시민사회 일부는 위성정당 창당에 가담했고, 노동계 지도부는 자체 수립한 총선 방침을 부정했으며, 진보정당은 자주성과 정체성을 포기했다.
‘심판’은 스포츠와 종교의 프레임이다. 정치는 상대를 단죄, 처단, 복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정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의견과 관점 차이’의 대결이다. 심판론은 블랙홀처럼 이 모든 진실을 빨아들여 정당화했다. 이번 선거는 정치적이지도 교육적이지도 않았다.
꽃이 저절로 피나
민주주의 ‘꽃’을 선거라고 말하지만 꽃은 저절로 피지 않는다. 꽃이 피려면 토양, 햇빛, 수분이 필요하다. 잎, 줄기, 뿌리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권력과 제도의 문제이자 개인의 이상, 정체성, 시민적 소양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개인에게는 다양한 덕목이 요구된다. 공적 의제에 관한 지식, 공동체를 향한 소속감과 연대의식, 사실과 주장의 구분, 스스로의 발언에 대한 책임, 권위를 향한 성역 없는 비판,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공감, 현상에 대한 성찰 능력 등이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유권자는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고려해 투표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창시자들은 다수결의 정당성을 '이타적 태도'에서 찾기도 했다. 즉 소양을 갖춘 시민들이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을 토대로 투표할 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될 수 있다.
막스 베버는 정치 행위의 길잡이를 ‘정치적 이성’에서 찾았다. 정치적 이성은 다음의 것들과 거리가 멀다. 선의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 흥분과 정서주의로의 몰입,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 실용주의를 거부하는 태도, 초월적인 근본주의적 이념과 실천론 등이다. 베버는 무엇보다 책임윤리를 강조하며 정치적 선택을 선악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했다.
총선이 끝난 지금도 사회는 정치적 흥분 상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탄핵, 특검, 사퇴, 복수 등의 단어가 여전히 언론을 도배 중이다. 물론 정책, 공약, 민생이 실종된 선거가 처음은 아니다.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정치인들과 언론도 문제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바꿔 권력을 동원하면 사회가 발전한다는 신념에 취해 정작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 우리 아이들이 처할 미래의 곤경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심판하는 어른이 아닌 책임지는 어른
꽃은 시선을 끈다. 선거 기간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가 되어 판세, 표심, 전략을 논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하지만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토양, 원칙과 본질을 말해야 한다. 목적 실현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시스템을 교란하고 기만했던 행태를 사과할 줄 아는 어른도 필요하다.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심판의 칼자루를 내 손에 쥐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정치와 교육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수년에 한 번씩 상대를 심판만 해대는 어른이 아니라 물을 주고 빛과 바람을 조절하고 거름을 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책임지는 어른과 뿌리 깊은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육은 진정,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이 글은 교육희망에 실렸습니다. _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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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교육희망에 '22대 총선, 정치적이지도 교육적이지도 않았다'라는 글을 썼다. 매우 평이한 글인데 위성정당에 대한 의견을 밝힌 한 단락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첫댓글부터 반응이 들어왔다. ("왜 위성정당 비판해? 위성정당 만들어 깨시민들이 정의롭게 심판했고, 책임지고 참여했는데!" "친일 빨간당 척결해야지 무슨 소리?"). 그 댓글들에 분노한 몇 분이 반박 댓글을 달자 처음 달렸던 댓글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이번 선거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고 화도 많이 났었지만, 딴에는 말을 아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사라진) 첫댓글들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고, 맡은 역할이 있으니 개인 생각을 밝히는 것도 조심스럽다. 뭐, 정당은 정당 나름의 논리에 의해 그럴 수 있다 친다. '실리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이견의 영역, 의견을 다투는 영역에 둘 수 있다.
하지만 야당 대표까지 위성정당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판국에 '더불어민주연합은 위성정당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노동계 일부의 궤변이나, 모든 과정을 정의로운 구국의 결정인양 포장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이기고 싶고 심판하고 싶은 건 알겠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를 속이고, 동지를 속이고, 나를 속여서 도대체 우리가 얻는게 뭐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