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언론창 '오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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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권 전문가 선생님이 강의 도중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아동 인권 운동가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여전히 아동 인권 운동가다.”
수십 년 간 숱한 교사들의 교권 문제를 상담해 온, 자타공인 한국 최고 교권 전문가의 다소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어두운 방 안에 갑자기 불이 켜진 듯 그 발언의 구조와 진정성을 뼛속까지 이해했다.
나는 교원노조의 지부장이다. 교원노조는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이익 향상을 도모하는 단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교사운동보다 교육운동에 관심이 있다. 교육인으로서 내 주된 관심 분야는 학생의 성장, 교육 철학과 전문성,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변화 등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쩌다 교권에 진심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현장의 실태를 파헤칠수록, 한국 교육 역사와 구조를 알면 알수록 현시점의 균형추를 맞추고, 변증법적 발전을 꾀하기 위해 교권 확보가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교권만 확보되면 학생 인권과 보호자의 권리가 자동으로 보장되고, 교육계의 온갖 모순이 삽시간에 해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육은 정치와 권력이 복잡하게 역동하는 갈등의 장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같은 지역 선생님들과 교권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교권의 바다는 생각보다 넓고 깊다. 과거에 나는 ‘교권’이란 단어가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져서 일부러 ‘교육권’이란 말을 썼다. 지금은 교권이 인권, 노동권, 교육권, 권위 등이 포함된 복합적 개념임을 알고 당당하게 고민하고 발언한다.
초·중등교육의 핵심 목표는 민주시민의 자질 함양이다. 이는 학교가 교육의 논리로 작동할 때, 교육 자치의 토대가 마련될 때 가능하다. 교육당사자들의 권리와 권한을 보장해야 학교가 민주적 삶의 공간이자 시민교육의 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교사는 교육 당사자들의 권리와 권한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요구할 수도 형성할 수도 없다. 교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교권의 개념과 역사를 공부할수록 교권은 반드시 교사의 손으로 쟁취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의지가 강해진다. 2023년 여름 교사들의 대규모 자발적 집회가 이어지던 시기, 교육부는 교사들을 겁박하고 회유했다. 교사들을 위로하겠답시고 어설픈 사기 진작 방안도 내놨다. 하지만 역사적 순간마다 매번 교권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건 누가 뭐래도 교육당국이다.
일례로, 2012년 공표됐던 서울교권조례(서울특별시 교권보호와 교육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는 한국 최초로 교권의 법적 정의를 세웠다. 하지만 한국교총은 ‘학교장 권한 침해’를 이유로 서울교권조례를 문제 삼았다. 심지어 교육부(당시 장관 이주호)는 ‘조례안 재의결 무효 확인 청구 소송’과 ‘집행정지신청’을 제기했고, 결국 2014년 대법원은 서울교권조례가 무효라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조례의 내용이 상위법과 충돌한다는 이유였다.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학생 교육에 관한 모든 권한은 장관과 교장이 독점하고 있다. 당시 교육부와 한국교총은 교권조례를 통해 교사의 자율권이 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수업과 생활지도를 직접 수행하는 교사에게 평가와 지도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전 세계 교육계의 보편 질서임에도 말이다. 그로부터 11년 후 교사들이 ‘가르치고 싶다’라며 거리로 나왔을 때 교육부가 행한 적반하장식의 협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교원의 사기진작 대책이랍시고 발표한 방안들이 얼마나 땜질식에 불과한지 잊어서는 안 된다.
교권은 권위주의나 자의적 권력과 동의어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교권도 피를 먹고 자란다. ‘피’의 다른 말은 공부, 사유, 실천, 투쟁, 연대, 합의 등이다. 교권은 외부의 권력자가 교사에게 하사하는 은총이나 선물이 아니다. 교권은 교육인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으로 무언가를 생성하는 행위다. 나아가는 행위다. 교사는 더 당당하게 교권을 말해야 한다. 숨 쉬듯 교권을 말해야 한다.
이 글은 '교육언론창'에 실렸습니다. 2024.05.14 0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