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김현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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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교사들에게 들은 사연이다.
교무실에서 동료 교사가 책상에 엎드려 '매일' 잠을 잔다고 한다. 휴게실에서 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꼰대로 비칠까 조심스럽단다. 또 다른 선생님의 경우 동료 교사가 크롭티(짧은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다고 한다. 복부와 등이 상당히 많이 드러나 마주칠 때마다 민망하고 학생들의 시선과 교실 학습 분위기도 우려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언급할 엄두는 내지 못한단다. 사연을 듣고 떠올랐던 내 생각은 글의 후반부에 밝힌다.
학교는 아노미
최근 학교 현장은 들끓는 활화산이자 아노미, 쉽게 말해 아수라장이다. 모두가 인권, 교권, 학습권 등을 말하지만 아전인수 격의 해석도 횡행한다. 당연한 결과다. ‘교권’의 법률적 정의는 부재하고, 학생은 존중과 보호의 대상일 뿐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의 ‘전문성,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과 재정, 인사 등을 중앙정부가 독점하는 한 교육자치도 말 잔치에 불과하다.
실천의 영역도 중구난방 주먹구구식 해석이 난무한다. 교권, 학생 인권, 보호자의 권리는 개념의 영역에서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사의 정당한 교육적 개입조차 인권과 권리 침해라며 맞서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인식의 무질서 현상도 심각하다.
예를 들어, 교사들은 전문성 인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저경력 교사가 고경력자보다 더 일을 잘한다’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수십 년 경력자보다 신규교사가 더 잘하는 일을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나. 혼란의 도가니가 따로 없다.
권위주의 시대의 이정표: 참교육, 참교사
과거 권위주의 시대, 변화를 꿈꾸던 교사들에겐 ‘참교육, 참교사’로 요약되는 일종의 이정표가 있었다. 인간 중심, 민주주의 실현,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건설이란 목표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실천도 동반됐다. 체벌하지 않고 촌지를 받지 않았다. 갑질 교장과 군사 정권에 항거하던 일군의 교사들에겐 참교육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의 장엄한 실천은 이후 세대에겐 법적 지침이자 기본값이 됐다. ‘참교육’은 인과응보란 의미의 밈이 되었고, 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참교사 역병’이란 표현이 심심치 않게 쓰인다. 혐오 표현이지만 맥락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급여, 노동강도, 변화한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헌신을 강요하며 훈수만 두는 일부 (선배) 교사를 향한 반발이 존재한다. 어떤 이유와 맥락에서건 ‘참교육, 참교사’의 형해화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교육 공공성: 새 시대의 이정표
이제 비판과 무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구심점,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하다. 나는 이를 교육 공공성에서 찾는다.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넘어, 학교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자리 매겨야 한다. ‘보호자는 소비자가 아니다’라는 비판의식은 시민 정체성 형성, 정당한 권리와 책임에 관한 논의로 전개되어야 한다. 학교는 한 명 한 명의 아이를 귀하게 여길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학교가 오직 한 아이만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긴장과 모순 역시 교육 공공성의 맥락에서 풀 수 있다.
교사는 민원처리 전담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교사란 누구인가. 지루(Giroux)의 이론대로 교사가 ‘변혁적 지성인’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글의 시작부에서 밝힌 사례로 돌아가 보자. ‘낮잠’과 ‘크롭티’에 관한 에피소드를 듣고 나는 이런 생각을 밝혔다.
“수면과 복장의 자유는 개인의 '권리'이므로 어떤 개입과 논의도 불가능하다는 단순한 논리 구조에는 일단 동의하지 않는다. 학교는 문화적, 정치적 장소다. 학생이나 교사가 학교에 수영복만 입고 등교해도 개성 넘친다며 박수를 칠 건가. 공강 시간에 학교 뒷마당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도 개인의 권리라며 침묵해야 하나.
근본적인 내 고민은 많은 이들이 학교가 공공의 영역이란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교육의 목적은 관리와 통제가 아니다. 하지만 학교는 무질서와 방종이 범람하는 장소도 아니어야 한다. 교육은 문화를 창출하는 과정이며, 교사는 교육 활동의 주체이자 존재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교육자료다. 티셔츠의 길이보다 중요한 건 사고방식과 영향력이 아닐까. 교육 당사자 누구라도 ‘내가 졸려서 자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드레스를 입든 망토를 걸치든 내 마음이다’라는 식의 피상적인 이해와 태도를 보인다면 학교의 공공성과 시민교육의 맥락에선 문제가 될 수 있다.”
혁명의 목적은 새로운 권위의 창설
교무실 낮잠, 크롭티 일화를 통해 허용 가능한 노출의 정도나 코골이 데시벨 따위를 심판하고 측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심판이 아닌 질문이 필요하다. 과거의 이정표가 생명을 다한 지금, 새로운 구심점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권위주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정당한 권위의 생성은 요원한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정당한 교육적 권위는 어떤 형태인가.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혁명의 목적을 ‘자유’ 그리고 ‘새로운 권위의 창설’이라 말했다. 교육 혁명은 새로운 교육적 권위의 창설을 요구한다. 권위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지만 나는 그 핵심 중 하나가 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을 이해하려는 노력, 사랑, 존중, 연민, 선의, 교육에 관한 열정 이 모든 것이 정당한 영향력으로서의 ‘권위’와 ‘공공성’의 부재 속에선 초점을 잃고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 글은 '교육희망'에 실렸습니다. 2024-05-13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