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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Dec 21. 2019

파이프

초등 교사는 팔방미인, 만능재주꾼이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다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통용되는 상식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모든 분야를 두루 잘한다기보다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고, 교과에 대해서도 그렇다.


올해 얼결에 체육을 맡았다. 1학기 때 6학년 배구 수업을 앞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나는 배구를 총체적으로 싫어한다), 교장 선생님에게 수업 지원을 부탁했다. 얼떨떨하셨겠지만 기쁘게 승낙하셨다. 우리 6학년들은 배구를 전혀 못 하는 체육 선생 덕에, 배구를 사랑하는 교장 선생님, 지역의 모 체육회장님이 참여한 특별한 수업을 했고 배구라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 학교 공익 요원과 레슬링 수업을 같이 하기로 했다. 공익 요원이 스포츠계의 대단한 실력자라는 걸 우연히 알고 찾아가 제안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배구 수업 때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의 대단한 기능 향상 자체는 내 목표가 아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스포츠인들이 스포츠를 존중하고, 즐기는 자세나 순수한 열정 같은 것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나도 이런 배움과 경험이 필요하고 말이다.  


나는 종종 교사는 파이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영어 능력이든, 글쓰기 능력이든, 신체 능력이든 내게 있는 어떤 능력이 학생에게 복사되듯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나라는 파이프를 타고,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세계로 미끄럼틀 타듯 넘어가, 다른 세계와 연결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파이프를 만난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선생은 아니지만,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숨은 보석들을 찾아 필요한 곳과 연결지어 예상치 못했던 상호작용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 또 교사가 파이프 같은 존재라면 나처럼 모자란 면이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면에 출중해 꽉 막힌 파이프보다는, 적당히 빈 구멍이 있는 파이프가 타고 넘어가기 좋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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