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육

내란시대의 안전교육

2025. 2. 17.

by 김현희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6


2년 만에 학교로 복귀해 일주일간 안전교육을 맡았다. 학급마다 한 차시 분량의 수업이라 간단한 겨울철 안전수칙 교육활동을 준비했고, 겨울 관련 어휘들의 초성 퀴즈로 수업을 시작했다. 겨울의 초성인 ‘ㄱ ㅇ’을 본 아이 중 몇몇은 곧장 ‘계엄’을 떠올렸다. ‘ㅍ ㄷ’에서 패딩이 아니라 ‘폭동’을 떠올리는 아이, 펭귄의 초성인 ‘ㅍ ㄱ’에서 ‘포고령’을 연상하며 중얼대는 아이도 있었다. 가히 내란의 시대다.



겨울철 신체 안전만큼 중요한 건 내란사태를 겪은 아이들의 심리적 안정이다. 지난 12월 아이들은 무장 군인들이 창문을 부수고 국회에 진입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폭도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경찰과 민간인, 기자를 폭행하는 사태도 겪었다. ‘대통령 아저씨’는 내란수괴 혐의로 체포됐고 그 과정에서 경찰관들은 사다리를 타고 차 벽을 넘었다. 아이들은 지금도 ‘반국가 세력’, ‘국회의원 체포’, ‘사살’, ‘처단’ 등의 언어, 온라인을 잠식한 비방과 선동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겨울철 빙판길 이상으로 위험한 상태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에서 펴낸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서 한국을 계엄 사태 이전에도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크게 쇠퇴하는 나라’, ‘민주주의에서 독재로 변모하는 종형 전환 국가’로 분류했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는 2020년 처음으로 세계적 ‘독재화 경보’를 발표했다. 2021년 1월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상징하듯 곳곳에서 민주주의는 빠른 속도로 퇴보하고 있다.



아동 정신건강도 대위기의 시대를 맞았다. 작년 국회 교육위에서 발표된 ‘아동·청소년 자살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초·중·고 학생의 자살자 수는 2014년 이후 10년간 81% 증가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밝힌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에서 우울증 진료 청소년은 5년간 75.8% 증가, 불안장애 진료는 93.1% 증가했다. 이 또한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아동·청소년의 불안, 우울, 자해 비율이 대폭 증가했다. 민주주의의 위기, 아이들의 정신건강 악화는 시대적 현상이다.



민주주의 쇠퇴와 이에 따른 내란과 내전 위험 증가의 원인, 청소년 정신건강 위험의 원인은 광범위하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공통 원인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저서 ‘불안세대’에서 2010년 이후 급속히 진행된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 악화 원인을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지목했다. 내전과 테러리즘 전문가 바버라 월터는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책에서 소셜미디어의 성장이 현대 사회의 분열 확대, 이민자 혐오, 포퓰리스트 당선, 폭력 사태 증가와 내전을 촉발하는 완벽한 촉매라고 피력했다.



위험 징후는 무성한데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실시간으로 폭력 사태에 노출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느끼고 있는지, 이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한지, 어떤 대화와 교육이 필요한지 등에 관한 고민은 전혀 없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규제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어느 때보다 시급한 지금, 교육부는 교육적 효과가 불분명한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에만 일편단심 매진하고 있다.



교육이 사회 양상에 따라 널뛸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변화를 감지하는 민감성은 필요하다. 가짜뉴스 예방교육, 디지털 윤리교육, 소셜미디어 중독 예방교육 등은 중요하나 이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계엄령이 ‘계몽령’으로, 폭동이 ‘시민저항권’으로 손쉽게 치환되는 시대, 정당한 교육권 행사와 인권침해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다. 대혼란의 시기에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되는 ‘한국교육은 파시스트를 기른다’란 외침은 국민교육헌장 암기를 강요받던 세대의 한풀이에 가깝다.



내란 시대에도 교육이 견지할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법과 상식, 권위에 도전하는 힘을 길러주되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존중 역시 끈질기게 강조해야 한다. 저항과 갱신의 과정에도 지켜야 할 절차와 합의가 있다. 그 과정은 때로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요구한다. 시민은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내란 시대의 교육은 민주주의의 불완전성, 모호성, 권력의 속성과 작동원리에 대한 처절한 성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영구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끝없는 참여, 비판, 돌봄, 연대, 합의가 필요한 복합적응 시스템이다. 내란으로 촉발된 정치 혼란, 소셜미디어 영향력의 확산, 잇따른 대형 참사와 끔찍한 범죄로 아이들의 정신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 원칙 사수, 어느 때보다 엄격하고도 유연한 시민교육은 내란 시대를 관통 중인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최선의 안전교육이다.



출처 : 교육언론[창](https://www.educhang.co.k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담을 넘을까, 문이 열리길 기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