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언론창 2025. 5. 14.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52
학교에서 내가 맡은 업무 중 하나는 ‘상담’이다. 자살예방교육, 사회정서교육, 도박예방교육 등과 더불어 교사 대상 각종 정신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교내에 안내하고 신청을 받는다. 교사 대상 관련 연수 명칭에 주로 들어가는 단어는 ‘힐링’, ‘마음’, ‘행복’, ‘돌봄’, ‘쉼’, ‘치유’, ‘건강’, ‘웰빙’ 등이다.
학교의 정신건강 관련 업무는 증가 추세다. 예를 들어 올해 3월 교육부는 전국 모든 학교에 ‘한국형 사회정서교육’을 6시간 이상 실시하라고 통보했다.(‘한국형 사회정서교육’의 뜻을 묻는 문의가 교육청에 빗발쳤다고 한다) 사회정서교육 선도교사단을 꾸리고, 교사 동아리 운영을 위한 예산도 대거 투입했다. 학교별 위기관리위원회를 매월 정례화하도록 지시했으며, 자살예방교육 확충을 위해 학급당 4만원의 예산을 편성하기도 했다.
학교 구성원의 정신건강이 큰 위기 상황인 건 사실이다. 작년 국회 교육위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 자살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초·중·고 학생의 자살자 수는 2014년 이후 10년간 81% 증가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밝힌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에서 우울증 진료 청소년은 5년간 75.8% 증가, 불안장애 진료는 93.1% 증가했다. 녹색병원이 실시한 ‘2024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조사’에서 교사의 소진, 우울, 직무 스트레스, 자살 충동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 지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우리 사회는 정신 관련 질환에 사회적 낙인을 찍었고 이에 필요한 조치가 늦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라도 정신건강 문제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리고 구성원을 돕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교육부가 사회와 학교의 복잡 난해한 사태를 오로지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로만 환원한다는 점이다. 청소년 정신건강 악화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북유럽 등에서도 발생 중인 세계적인 현상이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주원인으로 꼽고 있다. 한국 특유의 입시경쟁 또한 수십 년째 풀지 못한 난제로 청소년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2023년 여름 교사의 심각한 직무 스트레스가 처음 수면 위에 올랐다. 2년이 흐른 지금도 근본적 변화는 요원하다. 교사는 여전히 아동학대 신고, 민원, 소송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교사 소진의 주원인 중 하나인 과도한 행정업무는 경감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번 생긴 업무는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고 교육부는 매해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 업무 경감을 위한 업무가 생기고, 증가한 정신건강 지원 업무가 담당자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식이다. 지치고 불안한 교사들에게 당국은 ‘쉬어라, 힐링하라, 마음을 돌보라’며 각종 연수와 강의를 제공하는 것 외에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주의, 능력주의, 비민주적 교육체제
학교 구성원 정신건강 악화의 주원인은 사회에 만연한 소비자주의와 능력주의다. 90년대 말 들이닥친 교육 시장화 정책은 교육을 서비스 상품화했고 학생과 학부모를 교육 수요자, 교사와 학교를 서비스 공급자로 자리 매겼다. 이는 민원받이가 된 교사는 물론 학생에게도 고통이다. 시민의 정체성을 기를 틈도 없이 ‘능력있는 소비자’ 정체성을 강요하는 현실은 아이들을 소외, 고립, 아노미로 내몬다.
교육부 장관이 교육과정과 목표, 정책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한국 특유의 억압적 교육체제 또한 구성원 정신건강 악화의 주원인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를 ‘한국형 사회정서교육’을 실시하라며 느닷없이 교육부가 단위 학교 교육과정을 흔들고, 교육청이 각 학교에 계획서를 제출하라 지시하는 전횡은 민주공화국에서 발생해선 안 되는 사태지만 한국에선 당연한 일상이다.
나는 학교 정신건강 증진 관련 정책에 폭넓게 찬성한다. 위기 학생들을 위한 상담교사를 확충하고 모든 구성원을 위해 학교 자문의를 지원해도 좋겠다. 교사 대상 힐링 콘서트,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교사가 위로받길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교육부는 교육과정부터 목표까지 모든 것을 교육부 장관이 틀어쥐고 있는 비민주적 교육체제에 가장 먼저, 가장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 법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수많은 교사의 소진, 우울,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은 개선될 수 없다. 각종 상담 프로그램 확충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교육 현안에서 장기 과제까지 구조적 개선을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교육으로부터 해방 vs 교육 해방
지금 학교에 필요한 건 더하기가 아닌 빼기다. 학교는 보약보다 체중 감량이 우선이다. 학교를 향한 사회의 지나친 요구, 정권의 이익에 따라 요동치는 정책, 교육부의 무소불위 권한을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100년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30년은 내다보는 장기 전망 속에 당국과 학교의 작은 실천이 계속되어야 한다. ‘개인’의 ‘정신’ 건강 개선은 물질적, 구조적,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학교를 둘러싼 죽음과 상처와 고통의 행렬을 멈추자. 쉬고 상담하고 치유하고 마음껏 힐링도 하자. 하지만 도망치지는 말자. 우리가 바라는 건 '교육해방'이지 '교육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다. 자본과 국가가 바라는 건 어쩌면 그 반대일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학교를 보자.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