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2025 가을 vol. 157
얼마 전 학교 급식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몇몇 아이들이 깐쇼새우를 손으로 던지고 입으로 받아먹으며 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간 나는 눈빛 레이저를 쏘아 행동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바닥에는 던지다 떨어진 새우 소스가 그대로 남았고, 장난을 친 아이 중 누구도 닦지 않았다. 평소 학교 급식과 환경을 둘러싼 노동의 소중함을 자주 이야기해 온 나로서는 속이 부글거렸다.
‘교실에 가서 보자.’ 마음을 다잡고 돌아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영양 선생님 주변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학교 영양 선생님은 배식 후 남은 음식을 반찬통에 담아 돌아다니며 원하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신다. 나는 학생들에게 늘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라고 당부해 왔다. 그런데 그날, 식판을 이미 반납대에 던져놓은 아이들이 음식을 손에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당황한 선생님은 ‘앞에 가서 숟가락이라도 가져와, 그 위에 줄게’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이들은 ‘아, 그냥 주세요!’라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보다 못한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선생님 말씀대로 해!” 그러자 아이들은 "에이, 안 먹어"라고 말하며 급식실을 나가 버렸다.
흔히 말하는 ‘요즘 아이들’ 담론을 펼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요즘 아이들의 행동이 어느 때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예의 없다고 느끼는 건 나를 비롯한 다수 중견 교사들의 공통된 체감이다. 그 후 나는 모종의 훈육을 했고 내 입장에선 거의 봉변에 가까운 민원을 겪었다. 다행히 소통 끝에 마무리되었지만 ‘요즘 아이들’ 뒤에는 복잡한 ‘요즘 학부모들’이 존재한다는 현실도 다시 확인했다.
교사는 학생이나 보호자와 직접 대면한다. 전쟁 같은 설전, 폭언, 감시, 선을 넘나드는 민원, 법적 공방을 겪다 보면 문제의 원인을 학생과 학부모에게서 찾기 쉽다. 그러나 요즘 교육계를 뒤덮은 프레임, 즉 학생·학부모를 일방적 가해자, 교사를 피해자로만 묘사하는 자극적 서사와 여론 몰이는 교직 사회 밖에서 설득력이 약할 뿐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전략으로도 무용하다.
이 현상들의 본질은 학교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목적을 실현할 길이 제대로 설계되어 있는가에 있다. 한국 공교육의 목표는 분명하다. 민주공화국의 시민 양성. 이를 방해하는 요인은 학교 안팎에 널려 있다.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무분별한 행동은 혼란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가깝다. 나는 그 근본원인을 소비자주의, 감정 중심 교육, 어설픈 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소비자주의: 교실을 시장으로
급식실에서 아이들이 “에이, 안 먹어”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날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치 가게에서 흥정을 하다 “에이, 안 사”하고 나가는 손님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의 일기와 글쓰기를 보면, 경험의 많은 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물건이나 음식을 구매하는 행위에 갇혀 있다. 어떤 아이들에게 ‘놀이’란 게임과 편의점 쇼핑뿐인 경우도 많다.
학교생활과 교사와의 관계에서도 매사 흥정하려는 아이들이 늘었다. 휴대폰이 주는 안락함과 구매 행위에서 느끼는 전능감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40분 수업은 지루한 강제일 뿐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도 학교 수업은 늘 지루했다. 하지만 독재와 권위주의가 퇴장하고 난 자리에 정당한 권위가 세워지지 못한 결과는 혹독하다. 교사는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처럼 학생을 달래며 교육을 ‘판매’하고, 학생은 교사와 수업이 줄 재미를 저울질하며 ‘구매’한다.
공교육에서 제공되는 급식, 학습 준비물, 학교를 둘러싼 모든 노동은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에 가볍게 소비된다. 아이들이 학교보다 학원 공부를 더 진지하게 여기거나 학원 선생님이 낸 숙제에 더 큰 의무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부 무례한 학부모를 ‘진상’이라 부르는 표현 역시 고객-상인 관계에서 비롯된 소비자주의의 부산물이다.
교육당국이 강조하는 선택형, 미래형, 개인 맞춤형 정책은 이런 시장화를 강화한다. 소비자 정체성을 내면화한 학생은 수업과 교사를 상품처럼 평가하고, 불만 시 교체를 요구한다. 교육에는 필연적으로 강제성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배울 내용의 필요성과 의미를 이미 습득한 채 배움에 뛰어드는 학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로서의 학생은 '재미없으면 안 해'라는 심드렁한 태도를 기본값으로 장착한 채 교실에 들어선다. 교실의 시장화와 학생의 소비자화는 자본주의 시대상, 교육당국의 철학적 빈곤과 무능한 정책이 만든 합작품이다.
감정 중심 교육: 학생을 책임 없는 고객으로
공공장소에서 음식으로 장난을 치고, 주위를 어지럽히고, 타인의 노동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훈육이다. 아이가 새우 모양에서 느낀 호기심이나 선생님의 지시대로 숟가락을 가지러 가기 귀찮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공공장소 예절과 배려, 상상력을 교육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 교사는 말을 아낀다. 지도를 멈춘다. 아이들은 감정을 터뜨리고 부모는 항의한다. 무엇이 교육적으로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었고, 아이의 ‘감정이 다쳤다’라는 말이 상황 해석의 최우선 기준이 되었다. 교사의 교육적 판단보다 아이의 감정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최근 타임아웃 훈육으로 민원을 겪으면서 동료 교사들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놀랍게도 대부분 “이제 훈육은 포기하고 상담만 한다”고 답했다. 교육적 효과가 불분명하지만 ‘내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불만과 민원, 아동학대 신고가 두렵기 때문이다.
미국 탐사 저널리스트 애비게일 슈라이어는 그의 저서 『부서지는 아이들』에서 ‘과잉 공감과 배려가 아이들을 연약한 괴물로 만든다’라고 지적한다. 감정 헤아림은 필요하다. 하지만 오로지 감정만 고려하다 보면 아이는 행동의 경계를 설정할 수 없고 교육은 불가능해진다. 슈라이어는 특히 미국의 ‘사회정서교육(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SEL)’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SEL은 자기인식, 자기관리, 관계 능력과 의사결정 학습을 통해 감정 관리 능력과 관계 능력을 갖추게 하는 모델이지만 만만치 않은 부작용도 보고된다. 학생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 상태에 몰입하면서 불안과 나르시시즘을 키운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치료 중심 문화 확산, 과잉 진단과 약물 처방, 의존성 강화도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학교 현장도 다르지 않다. 이미 수년 전부터 교육당국의 정책은 ‘개인’과 ‘정서’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정서적으로 안전한 학교’, ‘개인 맞춤형 교육’, ‘교사의 역할은 지식 전달이 아닌 정서 지원’이란 정책적 구호가 이와 연결된다. 또한 교육부는 이미 미국에서 비판과 논쟁의 도마에 오른 사회정서교육을 ‘한국형 사회정서교육’이란 이름으로 도입 중이다. 청소년 자살, 우울, 자해 등 정신건강 문제가 대두되면서 2025년 초 교육부가 갑작스레 계획안을 발표하고 현장 도입을 강행하면서부터다.
감정과 정서 교육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감정 중심 교육이 감정을 과도하게 일반화하고 공적인 판단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다. 공동체 생활에서 감정은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공적인 질서와 교육적 논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감정 교육이 강조하는 화목한 교실 분위기, 갈등 없는 교실 역시 그 자체로 교육의 목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행한 '다정하고 공감 어린' 양육·교육 트렌드 속에서 훈육과 권위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은 경계와 울타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고 있다. 현장 교사로서 내가 볼 때,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급조한 한국형 SEL이 아니다. 규칙 실현과 훈육을 가능하게 하는 정당한 권위다.
어설픈 자유주의
한국 사회는 종종 자유와 방임을 혼동한다. 물론 개념적으로는 구분하지만 실제 학교·가정·사회 모두 자유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학생의 자유를 휴대폰 사용권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하거나, 맞춤형 교육과 과목 선택권 확대만으로 자유가 실현된다고 착각하는 식이다.
자유란 방임이 아니다. 즉 인간은 단순히 간섭이 없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나 투표권은 있지만, 정보 접근 권한이나 이해력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는 헛된 권리에 그친다. 창업의 자유는 자본이나 네트워크 등의 힘과 자원을 배경으로 실현된다.
이 진실을 외면한 대표적 교육 정책이 고교학점제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자유로운 과목 선택권 확대를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학생이 과목과 진로 선택의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려면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자기 이해 능력, 진로 결정 역량 등과 같은 능력이 필수적이다. 교육 인프라, 교사 수급, 가정 지원 등의 자원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입시 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허울뿐인 선택권 확대는 입시에 유리한 과목으로의 수강 쏠림 현상과 학생 개인의 부담, 교육 불평등만 가중시킨다. 어설픈 자유주의는 학생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억압하고, 허울뿐인 소비자의 권리만 강조한다.
소비자주의는 교실을 시장으로, 감정 중심 교육은 학생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고객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어설픈 자유주의 교육 정책과 무분별한 자본 논리를 통해 무방비로 시장에 내던져지고 있다.
학교, 작은 민주공화국으로 재구조화
학교의 시장화, 아노미화를 막기 위해서는 학교의 모든 체제를 시민 양성의 목표에 맞게 재구조화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학교가 학생이 시민으로 성장할 첫 터전이라면, 학교가 행정기관이나 보육기관, 서비스센터가 아니라 작은 공화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
공화국에서 학생회·교사회·학부모회는 단순한 권력 감시 및 기계적 균형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학생이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치 경험을 통해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실질적 장으로 작용해야 한다. 시민교육의 실행자인 교사의 업무는 행정 중심에서 교육과정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인사와 승진 체계 역시 행정 실적과 서류 중심에서 벗어나, 현장 경험과 구성원들 의사를 통한 민주적 선출 구조로 전환되어야 한다. 차등성과급과 교원평가는 공화주의적 협력보다 경쟁과 서열화, 구성원 통제의 도구로 작용하고 있어 폐지와 전환이 요구된다.
교권 vs 학생인권이란 낡은 대립 구도를 해체하고, 학생이 권리와 책임의 균형 속에서 시민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실질적 교육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교사의 정치기본권과 노동권 이슈는 개인의 인권 내지 권리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교사의 정치기본권과 노동권은, 교사 스스로 시민과 노동자로서 권리를 누리고 활용해야 뿌리 깊은 시민교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획득의 정당성을 갖는다.
시민을 기를 결심
오늘날 학교 담론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를 가해자·피해자로 설정하는 단순 구도로 흘러간다. 하지만 납작한 이분법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교권, 학습권, 인권, 참여권 등을 둘러싼 끝없는 시소게임만 야기할 뿐이다. 교사, 학생, 학부모는 더 이상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권 확보는 교직사회의 절실한 요구이지만, 교권이 교육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교육의 책임은 세계를 이어받을 새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데 있다. 교권은 이 목표를 향해 학교를 민주공화국에 걸맞게 재구조화할 때 비로소 자연스레 확보된다. 다시 말해, 교권은 공화국에 걸맞는 교육 체제의 부산물이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다. 교사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방어 능력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건 결심이다. 정치적·윤리적 결단이다. 교사는 ‘과거의 무소불위 권력자’ 혹은 ‘고객의 횡포에 시달리는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소비자 고객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시민을 기르겠다는 결단으로 서야 한다. 이 결심에서 출발하지 않은 교권 담론, 투쟁과 실천, 아이들과 미래를 향한 약속은 권력과 보신을 위한 사사로운 전략이자, 무책임한 위로와 언술에 그칠 뿐이다.
“교육이란 세계를 향한 책임을 선택하고, 공동체를 갱신할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행위다. 세상에 대한 공동 책임을 거부하는 이는 교육자가 될 자격이 없다.”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 1958
민들레 2025 가을 vol. 157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