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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리뷰

은중과 상연(feat. 사랑의 이해)

by 김현희
은중과 상연 ⓒ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2025), ‘사랑의 이해’(2022)는 모두 조영민 감독의 작품이다. 직장 안팎의 긴장과 절제된 로맨스, 감각적인 음악 등이 공통적으로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인물의 설계 방식이 닮았다. ‘사랑의 이해’의 안수영과 ‘은중과 상연’의 천상연 두 캐릭터의 감정적 인장은 열등감이다. 안수영의 열등감은 계급에서, 천상연의 열등감은 사랑의 실패(가족, 연인)에서 기원한다.


두 인물 모두 타인의 호의를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호의를 빚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사랑과 우정이 어긋나면 문을 닫아 버리고, 문을 닫는 걸로도 모자라 관계의 다리에 불을 지른다. 자기 파괴적 단절, 어떤 면에서는 단절이 아니라 소각에 가깝다.


(스포일러 있음)


예를 들어 안수영은 두 남자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다른 남자와 잤다‘는 거짓말을 꾸며낸다. 사랑은 물론 자신의 커리어와 사회적 평판까지 불태워 버린다. 천상연 역시 은중을 밀어내며 소중한 것을 빼앗고, 스스로 ‘보잘것없는 도둑년’이 되기를 택한다. 관계의 다리를 끊는 정도를 넘어, 돌아갈 기억 자체를 잿더미로 만드는 방식이다. 20대 때 상학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인용해 천상연에게 메시지를 건넸고, 그 메시지는 20대의 상연을 구원했다('길버트 그레이프가 집을 불태우고 떠날 때 태운 건 삶을 짓누르던 과거일 뿐, 자신은 함께 불타지 않았어. 새로운 곳으로 떠날 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였고, 누구도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았어. 너를 태워버리지 마.') 30대의 천상연은 그토록 사랑했던 김상학의 메시지를 정반대로 구현해 버렸다.


현실에서 안수영이나 천상연을 만났다면, 나는 그들을 성격 파탄자라 여기고 거리를 뒀을 것이다. 안수영의 선택처럼, 사랑했던 연인,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가슴을 부러 잔인하게 찢어가며 이별을 고할 필요는 없다. 또한 은중은 상연에게 마음을 열어 내 준 죄밖에 없다. 상연에게 몇 번이고 “도대체 은중이한테 왜 그래?”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물론 천상연은 은중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물었겠지. '세상은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러냐'라고.


두 작품 모두 스토리 전개에서 내 기준 삐걱대는 부분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호감이 갔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전개가 아닌가 싶을 때조차, 감정 과잉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인물들이 필사적으로 버둥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우들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고, 특히 박지현 배우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만나 대성하길 바란다.


보는 내내 나의 20대와 30대를 떠올렸다. 천방지축,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이삼십대 시절에 비해 수영, 상수, 은중과 상연의 시간은 훨씬 차분하고 성숙해 보인다. 이상할 정도로 끝내 상연이 마음에 쓰였다. 20대의 천상연은 곤란한 처지에서도 상황을 공정하게 해결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10여 년 후의 모습처럼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려 들지 않았다. 상연의 시간을 대하며, 내 눈엔 더없이 망가진 사람들조차 인생의 다른 시점에서 만났다면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해할 수도 용서하기도 어려운 인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연민으로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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