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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10. 2022

인류가 아닌 단 한 사람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영화 '헤어질 결심'(2022), '색계'(2007) 스포일러 있음


'헤어질 결심'을 본 후 생각이 날듯말듯 기시감이 몰려왔었다. 몇 주 후 리뷰를 쓰면서야 깨달았는데, 배우 탕웨이는 ‘헤어질 결심’ 이전에도 ‘인류가 아닌 단 한 남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셔버린’(진은영의 시 '청혼'의 한 구절) 역할을 맡았었다. 바로 이안 감독의 ‘색계’(2007)에서다.


탕웨이가 연기한 왕치아즈는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위해 조국을 버리고, 독립운동 동료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 '색계'에서 탕웨이는 총살 직전 거대한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동료들의 원망 어린 눈길을 홀로 감내했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직접 구덩이를 팠고, 그나마 손에는 술병을 들고 덜 외롭고 스산한 죽음을 맞았다. 여주인공이 땅에 파묻히며 끝나는 두 영화의 공통점을 깨닫고 잠시 아연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현재 영화계에 탕웨이보다 이런 종류의 멜로물의 정조를 더 잘 표현하는 배우가 없고, 그래서 반복적으로 이런 역할을 맡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 자체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각적 은유나 훌륭한 미장센 같은 것들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박찬욱은 자타공인 영화 장인, 프로 중의 프로이므로). 데이비드 린의 '밀회'를 참조했다지만 일부 장면만 오마주한 느낌이고, 그보다는 히치콕의 '현기증' 같은 영화들이 떠올랐다. 형사, 의심받는 여성, 높은 곳에서 진실을 마주한다는 설정 등이 익숙하다. 같은 배우가 출연한 비슷한 장르의 영화 '색계'를 보고 나는 속이 울렁거릴만큼 마음이 헝클어졌었다. 반면 '헤어질 결심'의 두 연인은 과연 사랑을 하긴 한건가, 연애를 저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나?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래'라는 캐릭터만큼은 묘하게 마음을 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리뷰는 영화가 아닌 단 한 사람, 서래를 위해 쓰기로 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은 서래와 자신이 같은 종족이라 여겨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호감이 먼저 왔고, 이유는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인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래의 '몸이 꼿꼿해서,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서' 서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해준의 대사에서 나는 살짝 웃음이 터졌다. 몸이 꼿꼿한 사람은 누가 봐도 해준이기 때문이다. 해준의 사랑은 얼핏 자기애에 가까워 보인다(물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자기중심적이라거나 가볍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래는 해준이 '품위 있어서' 좋다고 말하지만, 서래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불면증으로 나타나는 해준의 취약함이다. 서래는 해준을 염려하고 그를 재워주려 애쓰고 그의 붕괴를 되돌리려 한다.


해준은 형사로서의 직업윤리로 대변되는 현실의 바닥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색계'의 양조위도 마찬가지) . 하지만 서래는 발 디딜 땅은커녕, 낭떠러지에 매달려 붙잡을 풀 한 자락도 없어 보인다. 타국에 사는 외국인 범죄자이고 이미 사랑을 위해 바닥 없는 허공에 온몸을 던져 버렸다. 서래는 모국어를 쓸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이 본 영화의 대사를 상황과 끼워 맞추듯 어색하게 말한다. 자신의 명분과 윤리 기준에 기대 어머니 둘을 살해하고, 남편까지 죽일 수 있었던 사람이지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되묻는 모습은 혼란스럽고 고독해 보였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했을까, 사랑했다면 얼마큼 사랑했을까. 영화를 보고 문득 나는 그의 사랑을 계량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서래의 사랑에 대해서는 도량형을 들이댈 수 없었다. 서래의 사랑은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지도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볼 때 해준은 도망쳤고, 서래는 물러났다. 해준은 끝없이 방황한다는 고통 외에 어떤 책임도 졌다고 보기 어렵지만, 서래는 유책성을 스스로 끌어안고, 주체적인 결단을 내렸다. 영화에서 온갖 나쁜 짓을 다한 건 서래이다. 하지만 적어도 서래의 사랑에는 의심과 의문을 품기 어렵다. 이 영화에서 사랑의 완벽한 주체는 서래이다.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남편 '기도수'와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은 서래를 억압하고 착취했다. 소유욕이 강한 기도수는 송서래의 신체를 학대하고, 가축처럼 이니셜을 새기고, 외조부 이름의 건국훈장도 줬다. 임호신에게 서래는 트로피 와이프이자 돈벌이 수단이다. 중국인 관광객과 투자 유치를 위한 미끼로 활용하고, 서래의 습관을 무시하면서도 틈만 나면 사랑한다고 말하며 비싼 옷과 가방을 사주기도 한다. 기도수는 말단 관료였고, 임호신은 주식 애널리스트이지만 본질은 같다. 각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화신 같기도 하다.


나는 서래를 보며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아프다'의 뜻은 장애가 있는, 유색인종인, 퀴어인, 가난한, 관리하기 힘든, 부적절한, 난민 등의 의미다. '여자'는 생물학적 의미라기보다 '부차적인, ', '억압당하는', '학대받고 부인당하는' 등의 존재론적 카테고리를 일컫는다. '아픈 여자 이론'은 대부분의 정치적 저항 방식은 내면화, 생활화, 체화되어 있고, 정치적 저항은 고통이며 비가시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서래는 불법 밀입국 과정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가난한 여성 중국인이다. 수완의 대사에 의하면, 어머니를 살해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돌아가면 최소 무기징역을 받게 될 범죄자인 '아픈 여자'다.


헤드바는 '아픈 여자 이론'에서 현시대에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저항은 보살피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저항은 다른 이를 보살피고 스스로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여성화되고 그에 따라 비가시화되었던 역할인 간호, 양육, 보살핌을 자신의 일로서 맡는 것이다. 서로의 취약성과 섬세함, 불안정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지지하고 존중하고 힘을 싣는 일이다. 서로를 보호하고, 커뮤니티를 꾸리고 가꿔나가는 일이다.


서래는 누구보다 '돌보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보살피고, 독거노인들을 돌보고, 연인의 불면증을 염려하고, 그의 붕괴를 막는다. 아픈 여자의 돌봄은 고통이자 저항이고 그래서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즉 중국으로 돌아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않으려면 폭력적인 남편을 제거해야 했다. 어머니를 전문적으로 보살피고 싶어서 간호사가 되었지만, 정작 서래의 어머니가 원한 건 전문가의 손길을 빌린 편안한 죽음이었다. 사철성이 분노와 자기 연민에 취해있을 때, 사철성의 어머니가 진정으로 원했던 보살핌을 건넨 사람 역시 서래였다.


영화가 (다소 강박적으로) 강변하듯 서래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희생적이거나 '불쌍한 여자'로 바라보는 것도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서래를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대가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보고 싶다. 서래는 온유하게 돌보는 사람이며, 돌보며 저항하는 사람이다.




어느 인터뷰 영상에서 박찬욱 감독은 서래가 (영화에서 수백 번은 다뤄진 듯한) 전형적인 팜므파탈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의도를 존중하면서도, 한 여성이 팜므파탈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스토리가 너무 극단적으로 흐른 것이 아닌가 싶다. 서래에게는 남성을 파멸로 몰거나 혹은 자신을 파멸로 보는 양자택일의 길 밖에 없었던 걸까?


해준에게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내 생각만 해요'라고 말하며 떠나는 결말도 나로선 의아했다. 끝없는 불면의 밤과 죄책감이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나. 해준은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커녕 2차 붕괴를 맞고 산산조각 나버릴지도 모른다.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고, 서래라는 캐릭터도 그럴 것 같다.


무엇보다 서래 혼자서 너무 많은 책임을 졌고, 인류가 아닌 단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건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짓이다. 하지만 한 번도 제정신인 상태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의 제정신은 충분히 제정신인가. 존재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려보지 않은 사랑은 얼마나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나. 나는 영화를 보며 곧잘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말이 안 된다'라고 비평하지만 사랑할 때 나는 또 얼마나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는 짓을 했었나.


'헤어질 결심' 내가 최고의 영화 목록에 올릴 만한 작품이 아니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최애작도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같다. 하지만  주관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리얼리즘의 측면에서는 말이 되지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류의 멜로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같다. '왕치아즈' '서래' 변주하는 캐릭터도 끝없이 창조될 것이고,  캐릭터들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내놓는 나같은 사람들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그게 사랑 영화계의 규칙 아닌 규칙이 아닌가 싶은, 말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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