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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Apr 06. 2022

색, 계...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2018. 4. 6.)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2007)에서 왕치아즈(탕웨이)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조국을 버린다. 호동을 위해 북을 찢은 낙랑공주처럼. 사랑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한 마녀 메데이아처럼. 반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는 끝내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져버리지 않는다. 흔히 남자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여자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특히 영화 ‘색, 계’에서 주인공 왕치아즈는 연인 이를 구하기 위해 수년간 동거 동락해온 독립운동 동료들까지 죽음으로 내몬다. 그녀는 나약한 정념의 노예에 불과했을까? 


왕치아즈의 친구들이 죽어 마땅한 모리배들은 아니었지만, 왕치아즈의 입장에서 볼 때 그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동지라기보다 '도구'였다. 왕치아즈의 선택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비난받을 것이나, 적어도 그녀는 국가라는 환상에 매몰된 자동인형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도 전두환을 용맹한 군인이었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자답고, 의리가 있어 가까운 주위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도 한다. 그의 언행을 살펴보면 지금도 당시의 선택을 구국의 결단이라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남자다운 의리파였을까? 워낙 통이 크다 보니 국가의 안위라는 대의를 위해 작은 도시의 인명들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뿐일까? 내가 볼 때 그는 대범했다기보다 더할 나위 없이 비겁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자만이 책임과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할 수 있다. 용기 있는 자만이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떠안고 인간을 도구화하지 않을 수 있다. 전두환 같은 자들은 자신의 머릿속 작고 예쁜 그림책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겁쟁이다. 마초성을 과시, 증명하려 드는 대부분의 자들이 소아병적 망상을 벗어나지 못한 어린이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감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은 자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까? 매사 칼 같은 냉정함은 정의와 진리로 우리를 이끌까? 그리 간단할 리가 있나.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는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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