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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Apr 07. 2022

가장 빠르고, 큰 목소리

(2019. 4. 7.)

(2019. 4. 7.)


신규 교사 시절, 학교의 잡일(담당자가 명확하지 않고,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이 깔때기처럼 내게 모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두 명의 선배가 있었다. 한 분은 가장 빠르고, 가장 큰소리로 내 옆에서 화를 내주었다. 내 걱정을 해주었지만 말 끝에 자주 이런 언급이 붙곤 했다. "이래서 같은 실에 원로, 연장자가 있어야 돼. 젊은 사람만 있으니 학교가 우리 전체를 얕잡아봐!" 그분은 내게 당장 교무실에 가서 따지라고도 권했다. 정말 그래야 하나 싶어 내려갈 채비를 하는데, 다른 한 분이 조용히 나를 붙잡았다. 발령 초기니까 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그분은 속삭이듯 말했다. 가장 크고 빠르게 화를 내던 분은 그분을 '답답한 사람'이라 칭했다. 며칠 후 다른 교사가 나를 찾아와 어떤 일을 토스하려 했다. 그때, 초기니까 조심하라며 말렸던 선배가 조용히 내 앞을 막아섰다. "김현희 선생님 이미 업무가 너무 많아요. 이 상황에서 더 하라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가늘게 떨렸지만 단호했던 목소리가 12년이 흐른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가장 빠르게, 가장 큰 목소리로 내 걱정을 해주던 분이 그때 어디에 계셨는지는..기억나지 않는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세상에는 가장 빠르게 가장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이야말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첩경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소위 사이다라 칭해지기도 한다. 나로 말하자면 빠르고, 큰 목소리보다 다소 느리고, 주저함이 있더라도 단단하고 깊은 목소리가 좋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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