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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n 01. 2022

사랑에 제목을 붙이지 말 것

지난 일요일 조카와 대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다. 생후 200일을 조금 넘긴 아기인데 주말마다 자주 만났지만 동생 부부가 없는 채로는 처음이었다. 난생 처음 기저귀를 갈아 보려 눕혔는데 아기가 냉큼 몸을 뒤집어 야무지게 도망을 가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가만히 앉아 잘 노는가 싶더니 갑자기 엉덩이를 들고 바닥에 고꾸라져 울 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깍깍 웃더니 배를 밀며 거실을 휘저었고 나도 어느새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유식을 떠먹이고, 작은 손에 분유병을 쥐어주고, 눈 맞추며 책을 읽어주고, 품에서 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행동들, 이를테면 내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내 얼굴을 더듬으며 콧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도 마냥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가족 행사로 친척들 수십 명이 모이면 어린 사촌들을 돌보며 끝까지 함께 놀았다. 숙모들은 '놀아줘서 고맙다'라고 했지만 나는 놀아'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가 어렸을 때조차 더 어린 존재들이 경이로웠다. 몰캉하고, 유연하고, 따뜻하고, 상상을 자극했다. 나의 배우자는 나만큼 아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다정한 성품이고, 아이들이 그를 (이상할 정도로) 좋아한다. 길에서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다가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거나 손을 잡을 정도다.


  이런 성향인데다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 아이를 갖지 않느냐' 말을  해도 백번 넘게 들었다. 아이를 않겠다고 선언한   부모님과 크게 충돌했던 기억도 있다. 요즘은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지만, 조카가 사랑스럽다고 말하면 여전히 '지금도 늦지 않았다', '너희 부부는 정말  키울  같다'라는 말들을 듣게 되고 나는 익숙한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말을 삼간다. 어린 존재들을 좋아하는 것과 직접 낳는  별개라는 , 개인 생활을 포기할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 당신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가 없어도 부부 사이의 끈은 얼마든지 견고할  있고, 육아는 물론 소중한 경험이겠지만 사람은 제각각 다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장할 수도 있다는  등을 지적하고 설명하는  버겁다.


조카가 태어난 후 끈적한 말의 수렁이 다시 날 휘감는다. '조카가 예쁘겠지만 네 자식을 낳으면 달라질 거야', '네 새끼는 훨씬 더 예뻐'라는 식의 말들. 사람들은 참 쉽게 사랑에 서열을 매긴다. 그 어떤 애정도 부모의 위대한 사랑에 미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부모가 품는 사랑의 무게를 부정할 수 없지만 사랑이 측정과 비교, 경쟁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말의 향연을 듣고 있으면, 조카를 향한 사랑은 일시적이고 비생산적인 취미 활동이고, 오직 친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만이 가치있고 유의미한 노동인 것 같다. 나와 아기라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관계의 틀과 정의에 갇혀 규정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만큼 위대하고 거룩한 건 없다 말하고 물론 그것도 맞다. 그러나 여차하면 부모의 사랑만큼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돌변하기 쉬운 사랑도 없더라. 삶의 양태는 다양하다. 훌륭한 부모도 있고, 없느니만 못한 부모도 있고, 의지가 되는 친척과 남보다 못한 친척이 있고, 경우에 따라 부모 이상의 영향을 남긴 이웃, 선생님, 길가던 행인도 있을 수 있는 거다. 많은 한국인들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 개념에 집착하는데 이는 입양 가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사랑에는 국경도, 인종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조카를 향한 사랑은 왜 쉽게 '네 자식을 가지면 단숨에 변할 일시적 열병' 내지 '아류 사랑' 따위로 치부하는지 알 수 없다.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사랑에 책임감, 불안과 두려움, 욕망과 투사와 희생을 뒤섞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제 동생 부부는 아이를 돌봐준 것에 대해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나는 아기와 있는 시간이 설렜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거라 답했으며 동생의 배우자는 '언니와 아주버님이 있어 든든해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부모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사랑에 관한 맹목적 찬양이나 신성화가 아닌, 작은 울타리와 지지대 같은 것들이 아닐까. 누군가는 내가 세상 이치를 모른다고, 인생의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거라며 끝내 혀를 찰거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삶에 대해 모르는 건 피차일반이다. 경이로운 존재가 뿜어내는 생명력, 사랑과 자유를 마음껏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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