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4.)
크리스마스이브에 방학을 맞았다. 연말엔 마침 조카 범준도 유치원 방학 기간이라 사흘 동안 우리 집에서 지냈다. 범준과는 평소에도 자주 만나 놀지만,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용변 후 엉덩이까지 닦아주는 일상은 차원이 달랐다.
함께 100년 전통의 대전 중앙시장과 서천 국립생태원에 갔다. 계란빵은 맛있게 먹었지만 평일 아침의 한산하고 축축한 전통시장은 범준의 취향이 아닌 듯했다. 생태원에서는 기이할만큼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넘치는 긴팔원숭이들을 만났다. 나는 "움직임이 스파이더맨이랑 똑같다!"며 탄성을 질렀지만, 범준은 팔팔한 원숭이들의 몸짓과 흔들림 없이 인간을 관찰하는 눈빛에 다소 겁을 먹은 눈치였다.
어쩌면 범준은 고모의 언행불일치에 인지적 혼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간이 야생동물을 가두는 행위를 늘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갇힌 동물들을 만나면 범준보다 더 흥분해 뛰어다니기 때문이다.
범준은 늦은 밤까지 우리 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사흘의 강행군 끝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 오리 인형 또또를 안고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로 나를 보며 싱긋 웃던 작은 얼굴이 당황스러울 만큼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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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기간 가족들과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셜미디어와의 거리두기는 내면의 평화 형성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과 분노는 어쩔 수 없다. 눈과 귀를 비집고 들어오는 각종 소식들 때문이다.
일생을 대전 시민으로 살아온 내 입장에서 대전과 충남 통합 논의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통합은 뭐, 필요하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명분과 공적인 실익도 분명치 않은데다 논의가 수도권 중심의 발상, 통치 논리에 기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수도권을 넘어서야 하는지, 왜 모두가 메가시티의 주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경기도 인구가 천사백만이고 대전과 충남은 합쳐야 고작 삼백오십만이라는 식의 계산은, 효율과 숫자라는 망치로 지역이 축적한 고유한 삶과 문화, 자치를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다.
한편 집만 나서면 현수막 천지다. 이 곳 페북도 마찬가지다. 정체불명의 인물들까지 교육감 선거에 몽땅 뛰어든 모양새고, 교육운동 이력으로 광역자치단체장 출마 의사를 밝힌 분도 있다.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니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전교조 선배들이 교육운동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성찰하거나, 책임지거나, 후세대를 끌어주거나 받쳐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운동이 망하든 말든, 후배들이 길을 잃고 혼란과 공허를 느끼든 말든, 전교조 리더였던 타이틀과 이력을 이용해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롭기 어렵다.
심지어 오늘 아침엔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와 부인을 압송해 갔다는 소식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사실 요 며칠 나는 장장 10년 만에 막을 내린 '기묘한 이야기' 시즌 피날레를 보고 감상에 젖어 있던 중인데, 어떻게 이런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이런 대통령을 내버려 둘 수 있는지 모르겠다(물론 문화적 성취와 정치적 야만이 공존하지 말란 법은 없다). 마두로가 어떤 인물인지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국제법과 질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강대국의 패권 앞에 세상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가 쌓은 공통의 감각과 상식이 존재하긴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나를 둘러싼 사적인 울타리에서 한 발만 벗어나면, 세상은 그저 엉망진창이다. 수렁에 빠진 교육계도 정치판도 버겁다. 무력감에 회피하고 싶은 내가 자꾸만 보인다. 그럼에도 '새해', '시작', '출발'이란 말들이 주는 힘 덕분인지, 생존을 위한 위한 내 나름의 발악인지, 나도 모르게 불끈 이런 생각도 든다.
인생은 짧다. 올해는 힘껏, 본격적으로 정직해지자. 세상은 엉망진창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동물권을 들어 인간을 비판하면서도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관찰하며 환호하는 위선적인 면모까지 모두 나의 일부다. 그저 한 번에 하나씩,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용기 있는 인간은 되지 못해도 최소한 도망은 치지 말자.
새해를 맞았지만 희망은 도무지 잡히질 않는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세상일지라도 아이들은 자라고, 나는 그저 최소한의 경계선을 치는 마음으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말자는 다짐으로 울타리를 다듬어 본다, 정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