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_최종_찐 최종
디자인을 하다 보면 제일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정말 끝없는 수정과 커뮤니케이션... 유지보수 계약이 물론 돈이 되긴 하지만 계약이 진행된 순간 다시 끝없는 작업의 굴레가 시작된다. 시지프스의 형벌이 어떤 것인지 디지털로 겪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디자인 작업은 뚜렷한 끝이 안 보인다. 더 미칠 노릇인 것은 프로젝트 상 마감일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PM(Project Manager)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정의 조율 (대부분 일정이 미뤄지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역할이 90% 이상이 필요한 듯싶다.)이지만 사실 늦춰지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없다. 원래 있었는데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없다. 일정이 늦춰지기 시작하면 그 시점에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작업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결국 최종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한 시안의 반복이 시작되지만 허탈해지는 이유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초기의 시안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욕과 열정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부분에 대한 빌런 클라이언트를 이야기해 보자면 디자이너라는 종족을 그냥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색상, 요소, 콘셉트 뭐 이딴 것들은 다 무시하고 내가 이런 색을 좋아하니까 이 색으로 이 모양으로 이런 요소를 넣어서 해 줘 (이런 사람들 특징은 반말이 기본 탑재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시키면서 마치 본인이 디자이너가 된 것처럼 우리의 업무영역을 무시하곤 한다.
하긴 결국 돈 주는 사람이 '갑'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내가 돈을 받는 이유가 디자인 프로젝트를 해서가 아닌 누군가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비용을 받는 느낌이다. 돈을 줬기 때문에 하고 싶은 데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느낌이다. 초기 회의에서 나눴던 스케줄 따위는 어디 지나가던 멍멍이가 뼈다귀 대신 물고 간 느낌이다.
친해져라. 닭치고 친해져라. 친해질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라. 한국 사람들의 특징은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뭔가 자기의 요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끄러워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인데 본인의 무지의 영역에 대한 부끄러움이 너무 심하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는데 간단한 진리를 모르니 작업은 항상 난항을 겪는다.
놀라운 사실은 작업 의뢰자는 이런 요구사항 파악까지를 디자이너의 업무로 본다. 디자이너들은 우리는 시각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지 상담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부분까지가 디자이너의 업무이다. 좋은 디자인은 설득력 있는 디자인이다. 설득력이란 결국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실 제일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라포(Rapport : 상담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 신뢰관계 형성)라고 생각한다.
해답이 안 나온다면 친구를 만나보자. 그냥 아무 때나 불러서 만나도 서로 이름 대신 욕을 할지언정 아무 거리낌이나 부담이 없는 그런.. 만나보면 알겠지만 나도 모르게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무의미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문제와 해결책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정석적인 미팅이란 이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과 줄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할수록 회의는 짧아지고 결과물은 만족스러워진다. 클라이언트와 담당자는 둘 다 찐 E가 되었을 때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정은 바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석이 아닌 꼼수를 부린다. 나의 꼼수는 워터폴(Waterfall : 폭포처럼 떨어지고 반동으로 약간 올라오는 정도의 수정을 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방식의 업무를 진행하며 끊임없이 상황을 쪼개서 메일 발송을 했었다. 메일은 항상 흔적을 남길 수 있어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최적의 증거자료가 되어준다. 물론 이 방식이 통하는 것도 상대방이 의미를 이해할 때뿐이다. 미안해서 더 시킬 수 없을 정도로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퍼센티지 단위로 쪼개서 보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성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을 사용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작업에 대한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언가 변하기 바라는 것은 너무 얌체스럽지 않은가. 0과 1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라
다 만든 디자인의 가이드라인 (디자인의 사용 방향성이나 한계를 정리한 그것)을 작성해서 줬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다. 꼭 기억하자 도장 찍고 통장에 입금이 되기 전까진 완료가 아니다. 방심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정말 미안한데.."로 시작되는 전화가 온다.
오늘도 난 그렇게 리셋이 되었다.
[오늘의 디자인]
1.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돈 주는 사람이 '갑'이라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것이다.
2. 끝에 끝까지 방심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