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일이 나를 그런 시간에 두었다
으르렁 대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엔진이 순간 고요해지면 나는 잠에서 깬다. 회사 앞에 다 온 것이다. 나는 오늘도 셔틀버스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다. 출근길 50여분의 단잠은 왜 항상 5분처럼 느껴지는지.
아침 일곱 시 반. 비몽사몽 버스에서 내리면 드디어 사무실 문명의 시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렬로 늘어선 버스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찬란하게 번쩍이는 21세기 빌딩 사이로 20세기 직원들이 앞다투어 걸어간다.
나는 아직도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내 옆의 아저씨도 내 앞의 아가씨도 모두가 졸려 보인다. 사무실에는 아침부터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다.'
- <퇴사의 추억> 중
대기업 사원 시절 장사원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기분 좋고 가뿐한 느낌으로, 오늘 하루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일상의 문을 여는 따사로운 햇살에 감사하며, 설레는 하루를 맞이하는’ 경험 따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이라면 어렸을 때 ’빨강머리 앤‘과 같은 고품격 애니메이션의 어느 인트로 장면에서나 봤던 것 같다.
그건 마치 군대 기상 시절의 기시감 같은 것이었다. 새벽 5시 50분이 되면 어김없이 ’빰 빠빠빠 빠빠라밤바빠밤빠빠 바밤바-‘ 하고 울리던 내무반의 추억처럼,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침대 뒤에서 나를 꾹 누르고 도저히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왜 몬테네그로라고 하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장이 멋들어지는) 어느 국가의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인간은 피곤한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충분히 쉬어줘야 한다.
엄마 뱃속을 뚫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난제.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매일 이 하루를 뚫고 새롭게 태어나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현대의 첨단 산업사회의 눈부신 성과를 상징하는 빌딩 숲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출근 의식 역시 매일 경건하게 맞이해야 한다. 모두가 똑같은 시각 똑같은 복장 똑같은 표정으로 밀려 들어가는 출근길이야말로 사무실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인 것이다.
이러한 선진화된 문명이 정한 출근 시간이라는 기준을 단 1분이라도 어기는 순간, 나는 문명을 배신한 천인공노할 죄인이 될 것이다.
아침 7시. 이 시각 장사장은 쿨쿨 자고 있다.
어제도 집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다 새벽 2시쯤 잠들었으니 기상 시간은 아직 한참이다. 스마트폰 알람을 맞춰 놓지만 보통 잘 깨지는 않는다. 보통 8시간은 자려고 노력하며 적어도 7시간은 반드시 자야 한다는 게 장사장의 철칙이다.
출근은 10시까지지만 어제 밤에 얼마나 늦게 잤는지, 또 오늘 기상시의 컨디션이 얼마나 좋고 나쁜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며 보통 9시쯤 기상을 한다.
예전에는 늦게 일어나면 죄책감을 느꼈다. ’늦게‘라는 기준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다. 9시면 늦은 것이고 7시면 이른 것일까?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걸까.
그때는 9시나 10시에 기상을 하게 되면 ‘이 시간에 남들은 다들 한창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데 나는 오늘 하루도 패배자로 시작하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아침형 인간‘과 같은 자기계발서는 이러한 죄책감을 더욱 부추겼다. 특히 고 3때는 ’4당 5락‘이라는 말이 절대명령처럼 다가오기까지 했다.
'남들 다 4시간 자는데 나만 5시간 자면 루저다. 잠을 자는 건 게으른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시절에 깨어서 공부해야지. 졸리면 커피랑 에너지드링크를 먹으며 밤샘으로 버텨라'
이런 식의 초근면 사상이 널리 퍼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 3 시절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문제집을 펴 놓고 턱을 괴고 꾸역꾸역 인사를 반복하고, 밤새도록 독서실에서 공부한답시고 책상에 죽치고 앉아 있다 어느새 엎드려 침으로 거대한 고대 아틀란티스 지도를 그리곤 했던 것이다.
그게 다였다. 4시간 잤다고 해서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피로도만 올랐다. 오히려 진짜 공부 잘하는 애들은 수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푹 잠을 잔 상태에서 좋은 컨디션으로 집중을 더 잘했다. 나처럼 애매한 애들은 왜곡된 근면 정신으로 무장하여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중하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내고 있었다.
시간에 똥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명의 시간에 길들여지면 내 시간을 문명에 귀속하게 된다. 내 일상의 컨디션, 바이오 리듬, 집중이 잘되는 생리적 자연스러운 상태와 같은 것들은 소외되고, 획일화된 집단의 시간만이 유일한 기준이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장사장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수면이다.
좋은 수면이 좋은 문명을 만든다. 잠을 잘 못 자면 하루 컨디션이 좋지 않고 하는 일마다 족족 신경질이 난다. 중요한 의사결정이 많을수록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절대 금물이다. 푹 쉬고 푹 자고 맛있는 것을 먹고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는 신체와 정신 상태를 갖고 있을 때만 사업상의 의사결정이 잘 된다.
매일 최전선의 사업 전투 현장에서 온갖 사건 사고 이슈들이 빵빵 터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장사장이 유일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변수는 자신의 수면 상태인 것이다.
잘 먹고 잘 자자. 그래서 오늘 아침도 적절한 피곤함과 기대감으로 일어난다. 빨강머리 앤처럼 완전히 즐겁고 가뿐한 건 아니지만, 말괄량이 삐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퇴사학교 창업자 및 교장.
삼성전자 전략기획 및 사내벤처 부서를 경험하고 퇴사 후 1년 간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쳐 퇴사학교를 창업했다. 퇴사학교 창업 후 일주일만에 페이스북 좋아요 1만명을 돌파, 창업 후 1년이 지난 현재 5,000명의 직장인 학생을 만나고 50명의 선생님을 섭외, 매월 30개의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KBS 명견만리, SBS 스페셜, 독일 DIE ZEIT 및 조선/중앙/한겨레 뉴스, 매거진 등 70여개의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그 가치가 조명되었다.
퇴사 후 3개월간 100권의 책을 읽고 카카오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한 <퇴사의 추억>을 집필, 이후 <퇴사학교> 단행본 출간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들었고, 퇴사학교에서 <퇴사학개론>, <보통 직장인의 위대한 글쓰기>, <주말창업 시뮬레이션>, <지식창업론> 등 기존에 없던 획기적이고 진정성 있는 콘텐츠로 수업 기획 및 강의를 주도하며 많은 직장인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있다.
직장인 진로탐색 콘텐츠 정기배달 서비스 <순간퇴사>를 창간하여,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보다 행복한 일을 찾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과 대안 탐색으로 고군분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