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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움 Feb 21. 2024

파랑

파랑

파랑은 언제나 옳았지만 아쿠아블루와 울트라마린 색을 유난히 더 좋아했다. 그렇다고 내 삶의 무대가 

총천연색을 모두 품고 있는 드넓고 깊은 바다여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작년 지인들과의 송년 모임에서 남자 후배가 물었다.

“누나는 왜 블로그에 글 안 써요?”

“글쎄... 난 내 삶이 재미가 없어.”

“뭐든 써 봐요. 난 누나가 재미있어요.”


처한 환경이 힘들어지면 어느새 집으로 쏙 들어가 때를 기다리는 달팽이처럼 내가 잔뜩 움츠려있는 걸 

잘 아는 후배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장난처럼 내게 종종 이야기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던 

내 마음의 무게가 모임의 분위기를 누르진 않을까 진지하고 심각한 궁서체로 전해질까 싶어 

말 한마디를 조심조심 아끼고 아꼈던 나에게  '누나가 재미있다'고. 

평소 유쾌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길 바랐던 나는  “누나를 자꾸 놀려~!”하며 싫지 않은 내색으로  

그런 사람이고 싶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가 내 삶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보아주고 있다는 것을 재미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채색이었던 

내 삶에 생생하고 선명한 비비드 컬러가 입혀지는 느낌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후 불현듯 깨달았다. 너무 오래 일기조차 쓰지 않아  엄두가 안 나기도 했지만 

스스로 쓸모없다 여기며 내겐 쓸 이야기가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그리고 싶은 삶의 모습이 따로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내 삶에 오랫동안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무용하지만 무해한 것들을 좋아했는데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하고만 있지는 않은지 수년간 고민했다. 황혼 이혼 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시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들어주어야 엄마가 살아가실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들어주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은 잘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들어주기’도 나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여실히 드러났고 나는 무력한 죄인이 되었다.


내 삶의 장르가 끝나지 않을 스릴러에 가깝다 생각되어 싫었고 심지어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된 삶을 마주하여 내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 하지 않고 내가 속한 무대를 떠나 미어캣처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다른 사람들의 근사해 보이는 삶을 부러워했고 어리석게도 남의 무대 앞에서 

주인공 빼앗긴 배우처럼 슬퍼했다.  


삶이 순위 매기기나 기록 세우기가 아니고 타인의 욕망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지만 몸도 마음도 쉼과 회복이 필요하니 나를 여유 있게 기다려주어야 하는데...

두 바퀴 이상 앞서 달리고 있는 상대 팀을 따라잡고 싶은 계주 선수의 마음이 일어나 자꾸 조급해졌다. 

실은 어디로 뛰어야 할지 정확한 방향도 잘 모르면서...


문득문득 멀미하듯 일어나 끝내 접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했던 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간절한 바람도 잠잠해졌고 꿈에도 평생 소원이던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리는 날을 내 열심으로 앞당기고 싶은 마음도 묻어 두었다.  


깊은 바다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고요한 세상이 있음을 알고 그저 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물러나고 밀려가며 때론 웅장하게 때론 자잘하게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파도.

멀리서 보면 같아 보이지만 눈여겨보면 단 한 번도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파도의 모습이 일상을 닮았다.


잠시 일어났다 사라질 파도를 묵묵하게 끊임없이 밀어 올려 일으켜 세우는 바다.

자신이 칠흑 같은 어둠에도 잠들지 않는 바다의 일부임을 아는 파도는 바위가 조약돌이 되고 모래알이 되도록 매일 부서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힘을 신뢰하고 내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뜻밖의 일들도 받아들이고 내맡기며 내 삶의 무늬를 더 큰 이야기로 손수 수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한다. 

오늘의 부서짐과 균열을 무서워하지 않고 힘 있게 끌어안으며 햇빛이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처럼 

내 존재를 한결같이 비춰주시는 그 손길 아래 기쁨으로 빛나고 싶다.


미덕으로 가장한 속도에 자극받아 초조해하지 않고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의 찬란하게 아름다운 순간들을 

매의 눈으로 포착하고 내게 허락된 하루하루를 찬찬히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며 제대로 누리고 싶다.

장르와 상관없이 내 무대를 지키고 가꾸며 느릿느릿 말하더라도 끝까지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색의 미묘한 차이만 알고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막연히 끌려 깊이 있고 진중한 느낌의 울트라마린과 한없이 투명한 느낌의 아쿠아 블루를 좋아했던 나는 내 안의 어두움과 빛을 수용하게 되면서 그 빛깔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파랑의 다른 뜻이 바닷물의 주기적인 운동인 잔물결과 큰물결이라는 것에 새삼 놀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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