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를 지켜주는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많이 아프실텐데 정말 잘 참으시네요.
진짜 괜찮으세요?
아프시면 소리내셔야
안 아프게 천천히 진행해요. "
극소의 마취만 하고
콩다래끼 치료를 위해 생살을 찢으시던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이제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칭찬(?)으로 듣고 싶지는 않다고
속으로 까칠하게 반항했다.
정작 아프다는 말은 소리내어 못했네
꾹꾹 눌렀던 마음이 터져나오는 건 한순간
퉁퉁 부은 눈으로 병원을 나서는 길엔
넘쳐 흐르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건 다 날씨 때문이라고 핑계대며
(미안해...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
보고픈 막내에게 1년만에
조심스럽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도 참다참다 지쳐서
그러했을 것이라고
살기 위해 지금 거리두기를
하는 중이라고
오죽하면 그럴까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연락없는 녀석의 복잡한 심경과
괴로움이 이해되면서도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할까? 야속했었지
편하지 않은 여러 힘든 상황속에
가족인 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부담스럽고
충분히 버거울 수 있겠구나 싶어
살면서 힘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이
내내 미안해서
삶의 무게를 더 얹어 주고 싶지 않아
먼저 편하게 연락할 때까지
충분히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 안부를
떨리는 마음으로 전했다.
쓰러지지 않고 무사하게
그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주시길
오늘도 두 손 모으며
장난처럼 그와 나 우리의 절망이 끝나고
자책하지도 서로 원망하지도 않으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부디 조금 더 편안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