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림의 시절 돌보기
원인모를 통증으로 잠 못 이루며
새벽마다 한의원을 다니던 시절
‘고요한 포옹’으로 박연준 작가를 만났다.
아픈 내가 얄궂고 지겨워지려던 참이었는데
균열있는 나 그대로 괜찮다며
가만가만 안아주고 버틸 수 있게
삶의 온도를 높여 준 책이었다.
시적 운율을 숨길 수 없는 에세이라
더욱 매력적이고
슬픔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나
결이 맞는다 좋아하며
작가님의 여러 책을 필사하며 읽었더랬다.
지난 주 ‘소란’의 북토크에서 뵙게 된 작가님에게서
강인하지만 순수하고 투명한 소녀소녀함을 느꼈다.
말하고 싶지 않을 땐 시
말하고 싶을 땐 산문을 쓰신다는
박연준 작가님
줄 타는 사람이 처음 줄을 마주한 사람처럼
백지앞에서 막막하고 아득해지는 슬럼프를 겪으며
책을 쓰려던 첫 마음을 기억하고자
전업작가로 나아갈 수 있게 독자를 만들어 준
첫 에세이 ‘소란’으로 작년부터 북토크를 통해
천천히 차곡차곡 모은 독자들을 만나고 계신다고
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하셨다.
빨리 통과해야 하는 시절처럼 보이는
'어림의 시절'을 기억할 때
쓰고 읽기에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오실 수 있으셨다고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巢卵)이 될 테니까요.
당신이 가볍고 투명한 ‘소란’들을
반쯤 접힌 귀로
무심히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소란은 누군가의 등 뒤에서
잔잔해지기도, 어여뻐지기도 합니다. ”
'소란'은 시끄럽고 어수선함(騷亂)과
암탉이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두는 달걀, 즉 밑알(巢卵)의
중의적 뜻을 담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자신을 덮고 있던 슬픔의 근원을 발견하며
다른 에세이들보다 날 것의 언어로
쏟아내듯 써 내려가신 소란을 읽으며
금다래 신머루 캐릭터를 좋아했던
애틋하고도 그리운
나의 유년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어림(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두려움, 미숙함 그리고 맹목의 사랑)이
깃든 시절을 껴안고
쓰다듬으며 돌보아 오셨기에
즐겁게 슬퍼할 줄 알게 되었으며
해사한 웃음과 단단한 명랑함을 간직한
아름다운 글을 쓰시게 되셨구나.
작가님의 소란들이 잔잔해지고 어여뻐져서
암탉이 제 자리를 바로 찾아 들도록 돕는
소란처럼 귀한 존재가 되었듯이
내 안의 소란(騷亂)스러움도 끝내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되고
삶을 다시 살아내게 만드는
나만의 밑알(巢卵)이 되도록
나의 어림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보듬어주기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흐느낌, 입술을 비집고 겨우 나오는 말,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온몸에 끈끈한 막을 두르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말.
이런 것이 시에 가깝다. (…)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우리는 저마다 작은 바다를 가지고 있다.
내 몸에 작은 바다가 실고 있음을,
그리하여 본능적으로 큰 바다와 함께 흐르고 싶어함을 알겠다.
마음이 크게 휘어질 때나 폭풍처럼 달려가 어디 높은 벼랑에서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몸속에 사는 작은 바다가 성이 나 요동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럴 때는 그냥 어디 평평한 곳에 누워
작은 바다가 얌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야 한다.
큰 바다와 합류하여 흘러가는 일을 상상해야 한다. ”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
“새로 살 기운을 담기 위해 빈 항아리처럼 몸을 내 놓고 앉아 있는 일,
헛헛해진 속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허기와 건강을 돌보겠다는 다짐,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넓어진 마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 평화로운 얼굴.
이 모든 것이 ‘새 것’을 데려다준다. (…)
아프다는 것은 이겨내야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겪다,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새로워지는 것은 선물같은 일.
그러나 누구도,
너무 많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