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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Dec 02. 2024

명궁이 되어버린 소녀

2024년 7월 28일 아침,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 전에 엄마가 운명하셨어.”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순간, 내 세계는 흔들렸다. 나는 교회에 가기 위해 운전 중이었고, 마침 회전교차로에 진입하던 참이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고비가 있었잖아. 그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해왔잖아.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괜찮지 않았다. 다리가 떨렸고 손은 싸늘하게 식었다. 차 안에는 성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다리가 너무 떨려 차를 급발진시킬까 봐 두려웠다. 정신 차려야 했다. 함께 카풀하던 사모님이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었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그녀는 내가 느끼는 고통을 말없이 이해해 주었다.


며칠 전, 엄마를 보러 갔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불길한 예감이 스며 있었다. 남편도 같은 생각을 했고 나 대신 남편이 장례식장도 알아봐 주고 수의와 영정사진을 준비하는 등 본격적인 장례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하루종일 나무늘보처럼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밤새 드라마를 보았다. 생전 하지 않던 게임을 시작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면 그게 뭐든 괜찮았다.


주일 아침에 소식이 왔지만 빈소는 저녁이 되어서야 차려졌다. 우리 부부가 당장 시작되는 예배를 내버리고 출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인천까지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하나뿐인 딸이 도착하지 않으니 장례가 시작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화가 빗발쳤다. 초조해진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엄마가 목사 사위를 좋아하셨으니 기다려주실 거야’.


그러나 빈소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살아생전 치를 떨던 시댁 식구들이 전부 와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반면, 엄마가 그토록 사랑한 현재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오래전에 떠난 교회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오히려 먼 길을 달려와 주었다. 엄마의 빈소를 사흘 내내 지킨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싫어했던 시댁식구들이었다. 엄마가 사랑한 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이 요즘 바빠서 교회장으로 못 치러준다고 기함할 답을 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집회에 미친 인간들이구나 싶었다. 한 영혼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출생이고 죽음인데, 영혼을 목회하는 목사가 그 영혼의 마지막 가는 길, 주님께 보내드리는 천국환송예배를 마다하다니. 부목사들도 전부 자기 집회에 출동시켜야 해서 그렇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산 걸까. 엄마가 사랑한 사람들은 정작 엄마가 가는 길에 별 관심이 없고, 엄마가 싫어한 사람들은 장지까지 따라와 주었다. 엄마의 짧았던 삶을 누구보다 비통해하며 눈물 흘렸다.


나는 결혼을 하고 그 뒤로 친가에 발길을 끊고 살았다. 아빠가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일만 죽도록 해야 했던 것은, 그래서 우리 세 식구가 가난에 허덕이고 늘 가정에 긴장이 있었던 것은, 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만 일찍이 공장에 보내고 가르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내 생일 며칠 전에 있는 할머니 생신 때문에 할머니 생신에 돈 드려야 하니까 내 생일엔 포도 한 송이 놓고 넘어간 것도 상처였다. 한 번도 친구들을 불러 생일파티를 한 적이 없었다. 남의 생일에 불려 다니기만 하고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 엄마가 자초한 시댁살이라니. 할머니가 엄마에게 시킨 적이 없다니. 식구들의 말을 듣고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믿어졌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는 엄마의 딸인데. 엄마 말을 믿고 엄마 편을 들어줘야 되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말이 믿어진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고모가 나에게 공갈젖을 먹이며 울엄마에게 부엌일을 시킨 적도,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우리 집만 쏙 빼놓고 유산을 나눈 적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상속을 배분받는 사람이 되어보니, 본인이 상속을 포기하기로 동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몰래 일이 진행될 수는 없게 법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아무리 시누 시집살이가 무섭다 한들 내 새끼가 배고파서 칭얼대면 눈이 뒤집어지는 게 엄마의 마음이다. 당신이 뭔데 내 새끼한테 빈젖을 물리냐며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게 엄마의 마음인데, 우리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엄마 말만 듣던 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퍼즐들이 가족들의 말을 들어보니 맞춰졌다.


연을 끊고 산 14년의 세월.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분들의 얼굴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나는 그 점을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장 크게 보았다. 다들 예수님과 동행하는 얼굴로 빚어진 느낌이 있었다.

우리 엄마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로댕의 <지옥의 문>에 묘사된 사람들 같았다. 엄마의 모습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단순히 병의 고통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며 나는 엄마를 향한 슬픔과 분노를 한꺼번에 토해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빠를 째려보며 “마귀”라고 저주를 했다. 아빠는 평생 엄마가 필요로 할 때 부재중이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만은 엄마에게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아무리 엄마 편이라지만 그것만은 보증을 해야겠다. 아빠는 엄마가 미국에 무슨 박사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미국행 티켓을 끊어주고 경비를 댔다. 평생 미국에서 살다가도 암이 걸리면 한국으로 들어올 판에, 엄마는 ABC도 잘 모르면서 무슨 암치료를 받으러 미국을 간다는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기도로 낫는다더니 기상천외한 길을 찾아버린 우리 엄마.


아빠는 직업 특성상 주일도 잘 못 지켰고, 엄마는 항상 그런 아빠가 불만이었다. 그렇게 가끔씩 교회 나가는 사람이 그리고 내성적인 사람이, 적응될 만하면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여기 아니래”라고 교회를 옮겨대니 믿음이 자라 가기 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엄마를 봤던 마지막 날은 내 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날로, 내가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빠가 지난 겨울, 계속되는 식사 부진으로 인해 빈혈로 계단에서 쓰러져 이가 위아래 다섯 개가 몽땅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소식을 듣고 너무 걱정이 되어,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아빠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계단에서 쓰러졌는데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야” 했더니 “쓸데없는 데 정신 팔고 다니니까 멍청하게 넘어지기나 하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부모님은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서로를 헐뜯을 건가. 대체 몇백 년을 살길래 저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건가 안타까웠다. 아빠가 빈혈이 온 것도 엄마가 집 비우고 미국이고 어디 기도회고 뭐고 쫓아다니느라 거기 갈 때마다 아빠가 기사 해주고 직장일 병행하느라 고단해서 그렇게 된 건데 왜 저렇게밖에 말을 못 할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엄마를 챙기느라 저렇게 수척하게 말라가고 아직도 이 치료는 받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데 엄마는 그런 남편에게 한다는 말이 마귀라니. 엄마는 내가 본 것만 해도 이미 너무나 수없이 많이,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이 아빠 탓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이렇게 먼저 떠나버리고 아빠 혼자 남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들 텐데, 엄만 아빠한테 고맙다 사랑한단 말은 하지 않고 다 죽어가면서도 그러고 있는 게 너무 화가 나, 생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독화살을 겨누다.


엄마, 엄마는 천국 소망이 없어? 왜 이렇게 아등바등해? 엄마 맨날 죽고 싶다고 노래 부르지 않았어? 엄마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리라고, 나 해병대처럼 팍팍하게 키우지 않았어? 이제 엄마 평생 바라고 노래를 부르던 대로 곧 죽게 생겼네. 얼마나 좋아? 신나서 곱게 가란 말이야. 근데 왜 안 가려고 이렇게 삶의 끈을 꼭 붙잡고 이러고 있어? 엄마 예전에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삶의 애착 때문에 못 돌아가시는 할머니들 보면 뭐라고 그랬어? 추접스럽다고 하지 않았어? 더워 죽겠는데 할망구들이 자기밖에 몰라서 에어컨도 못 켜게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엄마 모습이 더 엄마밖에 모르고 있네.

호스피스 병원 엄마가 가고 싶다고, 당장 들어가야 되겠으니까 빨리 알아보라고 새벽 두 시에 나랑 이모한테 전화하지 않았어? 그래서 알아본 건데, 엄마가 입소날 되니까 안 간다고 두 번이나 취소시킨 거잖아. 그래놓고 이제와선 아빠가 엄마를 호스피스에 처박으려 한다고 외삼촌들한테 말하면 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맨날 하더니 주님이 엄마 이젠 주님 품으로 오라고 부르시지는 않아? 나 어릴 때부터 엄마 암 걸릴 거라고 맨날 말하더니 결국 엄마 말하던 대로 그대로 됐구만 뭐가 불만이야? 그러니까 엄만 사실 죽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 엄마가 필요할 때마다 죽을 거다 죽는다 죽고 싶다는 말로 나랑 아빠 조종한 거야.

남편한테 맞았다고 다 암 걸려? 천만에. 우리 어머니도 맞았지만 저렇게 명랑하고 씩씩하게 잘만 사셔. 과장님이 엄마 죽이려고 한다고 하면서 엄마 정말 아파지고 힘들어질 때마다 과장님 손에 살아나고 있는 거 몰라? 조금만 살아나면 또 처방한 약 이건 빼고 저건 빼고 가려서 먹고 엄마 멋대로 처방해라 말아라 하고. 엄마 정말 진상환자야. 알긴 알아?

엄마, 나도 그렇고, 세상 그 누구도 수술대 올라가면서 즐거워서 올라가는 사람 없어. 다 병 걸린 값으로 그런 거 감내하면서 사는 거야. 핵분화도도 공격성도 높은 암이면서, 호르몬 약도 안 먹고 재발하지 않길 바라? 약 안 먹을 거면 정말 기가 막히게 운동하고 살 빼고 죽기 살기로 했어야지. 그런 건 없었잖아. 진짜 몸으로 힘들게 해야 되는 건 하나도 안 하고 그냥 뭐 믿음으로 어쩌고 저쩌고 입으로 다 하고.

조직검사하면 암이 더 번진다더니, 그렇게 검사 안 하고 아껴서 지금 잘된 거 있어? 의사 무시하면서 병원엔 왜 자꾸 와? 식구들이 엄마 다 다고 생각해서 조용히 있는 게 아니야. 엄마가 아픈 사람이니까 참고 배려하는 거라고. 아빠 탓 교수님 탓 좀 그만해. 다 엄마가 선택한 병원이었고 교수님이었어. 그리고 엄마가 뭐 언제 누구 말 듣는 사람이냐고. 엄만 항상 주님 음성 듣고 한 거 아니야?

엄마는 대체 왜,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줘?

이모가 엄마를 얼마나 생각하는데, 맨날 봉투 주는 거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런데 뭐 돈으로 유세하지 말라고 하면 어떡해? 이런 거 저런 거, 다 내가 앞으로 갚아야 할 빚이라고. 엄만 나한테 유산은 못 남길망정 대체 무슨 배짱으로 온동네방네에 빚만 척척 지고 있어?

엄마 진짜 주님음성 들은 거 맞아? 그냥 엄마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 말들이지?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 것 같은데 이제까지 평생 참은 거 한 번만 더 참을 것을 내가 너무했나 싶기도 했다. 엄마는 항상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열심히 했을 뿐이고 그땐 그렇게 말씀하셨고 이번엔 이러시기에 순종한 것뿐일 테니 말이다.

엄마는 제가 없는데, 내가 이상한 애고 못돼 먹은 딸년이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엄마의 질긴 삶의 애착을 끊어주려 했다. 손써볼 모든 시간을 이미 스스로 다 놓쳐버리고 말았는데, 엄마는 이제 와서 모든 식구들과 사돈까지 들들 볶으며 독화살을 뿜고 있었다.

내가 나쁜 년이 되더라도, 엄마의 고통의 시간을 끝내주고 싶었다. 엄마의 유일한 대나무숲이 이제는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그 고통을 꿀럭꿀럭 게워내려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 엄마에게 브레이크를 걸 사람 나밖에 없었다.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았기에, 어떤 말이 예리한 화살이 되어 폐부를 꿰뚫을지 또한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실, 우리 엄마 원래 이 정도로 악에 받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도 고단한 세월에 묻혀 변해버린 것이다. 엄마 말 때문에 상처받는 가족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엄마의 무례함에 놀라고 넌더리나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자꾸 늘어만 갔다. 모두의 기억 속에, 고왔던 우리 엄마만 남기고 싶었다. 그런 저런 이유엄마에게 쏟았던 저 말들 때문에 나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아파하게 될까. 내가 다녀간 뒤 엄마는 하루하루 삶의 끈을 내려놓고 그렇게 떠나셨다.


엄마가 나 똑 부러지게 가르친 대로, 독화살 맞고 자라 지독한 명궁이 되어버렸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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