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엄마는 동네 의원을 갔다가 암인 것 같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며 의뢰서를 받았다고 했다. 자기는 1지망 아산병원, 2지망 국립암센터이니 유방암 잘 보시는 교수님을 알아봐 달라고. 암센터는 일산대교만 건너면 갈 수 있기에 다니기가 수월할 것 같아 먼저 알아봤지만 교수님 학회 일정이 장기간 있어 초진까지 많이 기다려야 했다. 아산병원도 줄이 만만치 않게 길었지만 있는 줄 없는 줄 다 끌어다 대서 생각보다 빨리 초진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수술 날짜가 잡혔고 그렇게 엄마는 산정특례대상자가 되었다. 한 달 뒤 우리 2호의 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이의 첫 생일을 어떻게 챙겨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엄마가 암이 걸리기까지 우린 여행 한번 다녀온 적이 없었다. 휴가 때도 늘 아빠는 만성피로에 찌들어 밥때를 제외하곤 온종일 잠만 주무셨다. 어쩌다 포천 일대 어디쯤이나 강원도 가는 어귀 어느 이름 모를 계곡(심지어 강원도를 시원하게 간 것도 아님)에 잠깐 발 담그러 한나절 다녀오는 것이, 우리 가족의 휴가였다. 펜션에서 자거나 야영을 하거나 하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있을 수 없는 사치였다. 무박 나들이를 가면서 식사마저도 간편하고 저렴한 메뉴들만 먹었다. 길가에서 직접 만들어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보온병에 담아 온 물을 사발면에 부어서 말이다.
한 번은 기차를 타고 외가에 간 적이 있었다. 외가에 가다니,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밤을 새워서 가는 느린 호남선 열차 안에서, 나는 구례역만 기다리며 즐거웠다. 구례역을 지나면 그다음 역은 드디어 외가이기 때문에 구례, 구례만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정작 외가는 무슨 역이었는지 모르겠다 큭큭.
읍내 시장에서 수박을 한 통 사가지고,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가는 버스를 타고 외가에 들어갔다. 가드레일도 없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나는 버스가 낭떠러지로 처박힐 것 같아 너무 무서웠는데, 마지막에 결국 이리저리 흔들리던 버스 안에서 아빠가 수박을 묶은 끈을 놓치는 바람에 수박이 데굴데굴 굴러 가 계단 아래로 떨어져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나는 멀미가 없는데도 지금도 좌우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갈 때면 너무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서 연애할 때 남편이 북한산을 드라이브하거나 중미산로로 핸들을 트는 날엔 속으로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도대체 어디를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이 오빠가 좋았기에 버텨냈었다. (보고 있나, 남편. 내가 당신을 이만큼 사랑한다. 당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건 나도 함께하고 싶었어)
엄마가 암에 걸리고 나서야, 우리는 1박 여행을 떠났다. 첫째를 여러 겹 옷을 입히고 둘째를 등에 업은 채 엄마와 화순 적벽을 보러 갔다. 고창의 서늘한 아침 공기, 적벽의 쨍하게 맑았던 가을 햇살이 기억난다. 암이 뭐야, 수술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올 거야. 아니, 그런 수술을 앞둔 일 따윈 없다는 듯이 우린 낮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숙소에서 자다가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엄마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엄마는 혼자 울고 있었다.
“엄마 우리 내일 적벽 보러 가려면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해, 어서 자” 했더니 엄마는 갑자기 속사포처럼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젖을 주려고 했는데 네 고모가 자기 빈 젖을 먹이면서 나를 부엌에서 계속 일을 시켰어. 그래서 젖이 너무 고여서 내가 유방암에 걸린 거야. 그때 그렇게 한 게 너무 후회돼.” 하며 하소연을 하셨다.
나는 아이 둘을 카시트에 태우고 내리고 반복하고 장거리 운전하고, 식당 및 숙소 알아보는 등의 일들이 너무 고단했는데 지금에서야 30년도 훨씬 더 지난날 젖 못 먹은 이야기가 뭐 중요한가 싶었다. 그때 엄마 젖 못 먹은 것보다 오늘 잠을 못 자는 게 더 내 건강과 면역력에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나한테 미안할 거 없다고, 그래도 이렇게 잘 자랐지 않냐고 엄마를 빨리 다독여 다시 잠자리에 드시게 기다렸다. 무척 고단했지만, 엄마가 잠든 뒤에 자야 안심이 되었다. 엄마보다 내가 먼저 잠들어버리면 엄마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던 엄마가 이제 이런 여행까지 하고 났으니 여한이 없어 정말 떠나버리시면 어떡하나. 일단 오늘은 내가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 아이들만 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된다.
그렇게 첫 여행도 가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엄마는 수술을 받으셨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까지 모두 무사히 마치셨다. 항암 중에는 내가 우리 시골집으로 엄마를 모셔, 예쁜 비니도 많이 사드리고 드시고 싶다는 것을 해드렸다. 꽃게탕을 그때 처음 끓여봤다. 맛이 있었을까? 엄마가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루종일 별 소음 하나 없는 조용한 시골에서,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산책을 하시며 항암산을 잘 넘으셨고 방사선치료는 내가 매일 동행할 수가 없어서 병원 인근에 암환자 요양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모셨다. 엄마는 망가진 자기 모습 대신,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며 찍은 아직 추운 봄의 사진으로 내게 안부를 전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암 진단 후 5년 동안 6개월마다 관찰을 해 재발 소견이 없으면 관해 판정을 받게 된다.
2022년 여름, 엄마는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했다. 영상 결과에 무슨 소견이 보이니 다시 아산병원에 가라고 했다는 연락을 내게 했다. 그런데 자기는 이제는 수술도 항암도 방사선도 너무 싫다고, 절대 그런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힘듦을 모두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엄마의 뜻을 존중했다. 엄마는 그 뒤로 여기저기 유명하다는 집회들은 다 쫓아다니는 것 같았다. 전화를 하면 잘 받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나중에 쉰 목소리로, “어 집회 중이었어”하고 답신이 왔다.
2023년 1월, 엄마가 갑자기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자기에게 무슨 역사가 일어났다고. 분명 치유받았다고 했다. 촬영을 다시 해봤는데, 아무 흔적도 없이 모두 정상이더라고. 이야기만 들으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왠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내 안에 끝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엄마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손바닥 뒤집듯 한 적이 너무, 너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셨을까?’ 나는 의문을 가졌고 남편은 기뻐하자고 했다. 주변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그런데 나는 완전히 믿었다가 나중에 아니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반만 믿기로 했다.
2023년 7월, 엄마가 갑자기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하셨다. 원래 별일이 없이 놀러만은 오지 않으시는데,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내게 채식을 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이서방도 아토피가 있으니 고기 주지 말라던 엄마는 시장에서 소고기 돼지고기 바리바리 사다가 냉장고를 채워 넣으셨다. 엄마의 그런 이중 메시지에 난 이골이 나 지겹다고 느꼈다. 대체 엄마는 언제까지 이럴까?
그러더니 갑자기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자기가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서 교수님을 만나러 다녀왔는데, 가슴은 물론 쇄골, 턱, 임파선 등 사진에 보이는 상체에는 다 암이 퍼졌더라고 했다. 교수님이 오늘 집에 가지 말고 그냥 바로 입원해야 한다고 하셨다고. 입원할 준비를 해서 다시 오겠노라 하고 그 길로 부산에 오신 거였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는데 내가 그때 온전히 믿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자책하고 싶지 않다. 줬다 뺐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능자를 원한다. 나의 어떠함과 부족함에 전혀 지장 받지 않으시는 크고 절대적인 권능자. 내가 이렇게 했다고 이렇게 되고 저렇게 했다고 저렇게 되는 그런 신이라면 나는 신뢰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엄마는 치유받았다고 믿었지만, 나는 혼란스럽다.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면 왜 엄마가 결국 암으로 사망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때의 치유는 반쪽짜리 역사였던 것인가?
엄마는 그날, 목사 사위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기도를 받고 싶어 했다. 우리는 모두 엄마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해 드렸다. 나는 전심으로 기도했을까? 그러지 못한 것 같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가?
정말 믿고 싶었다.
미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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